독서 후기

"흑산도 하늘길" 을 읽고...

깃또리 2005. 8. 31. 13:04
 

"흑산도 하늘 길" 을 읽고... 

한승원 장편소설

2005.08.12

 

 

 

 

 작가 한승원(1939~1966)은 전남 장흥 바닷가에서 출생하여 1968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목선>이 당선되어 등단 후 이상 문학상을 비롯한 주요 문학상을 모두 수상한 중년작가이다.

 특히 바다를 배경으로 많은 작품을 썼으며 1999년 <포구>로 제1회 해양문학상을 받기도 했는데 정약전의 유배생활을 소설형식으로 쓴 <흑산도 하늘길>도 바다에 대한 묘사가 자주 나와 바다에 대한 작가의 끊임 없는 관심을 엿볼 수 있다.

 작가는 10년 전 번잡한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고향 장흥에 내려가 대숲을 뒤로하고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작은 집을 구입하여 “산은 산이로되 바다 물속에 잠긴 산”이라는 의미의 “海山”이란 자신의 호를 붙인 “해산토굴”에 은거하며 작품활동을 펴고 있다.

 

 정약전은 진주목사 벼슬까지 올랐던 정재원의 네 명의 아들 중 이복 형 약현 다음의 둘째로 아래로 약종과 약용 두 동생을 두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조선3대 저술가의 한 사람으로 그의 3대 저서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를 비롯하여 500여권의 책을 지은 실학자로 이름 높은 학자이나 정약전은 다산 선생의 형으로 흑산도 유배 중 “현산어보”를 지은 사람 정도로 동생의 명성에 가려진 인물이기도 하다.

 

 나는 오래 전 박석무씨가 당시의 정치상황에 울분이 차 써 내린 후기가 붙은 <다산 산문선>을 읽고 다산선생에 대한 지식을 얻었는데 바로 그 책에서도 자신의 형 약전의 이름이 자주 등장하였다.

 또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라는 다산의 서간문 모음에도 흑산도에서 귀양살이하는 약전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와 두 사람의 우애가 돈독했음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사실 이 소설의 주인공 정약전과 조선시대 제일의 저술가 정약용의 이해를 위해서 몇 가지를 먼저 짚어볼 필요가 있다.

 두 사람을 지극히 총애했던 정조임금이 승하한 다음해에 불어 닥친 1801년 신유박해 또는 신유교난이라 부르는 피 바람에 대해 특히 설명이 필요하다. 영조시대부터 탕평책을 구사하지만 정조시대에도 여전히 당쟁이 심하였고 정약전 형제는 남인시파로 남인벽파의 끈질긴 견재를 받았는데 정종임금의 의문의 죽음 이후 남인벽파가 득세하여 시파 제거를 위해 천주교를 구실삼았다.

 당시 천주교는 천주학이라 부를 정도로 종교 색체와 함께 서양근대 학문의 안내 역할을 하였으며 주로 매년 왕래하고 중국 사신 행사를 통해 조선에 교리에 관한 책자가 공급되었으며 중국인 신부 주문모가 조선에 입국하였다.

 실학파들에게는 낡은 주자학이 가르치는 화,수,목,금,토 오행보다는 불,물,땅,공기 4원소설을 비롯하여 만민평등사상이 담긴 천주교에 큰 관심을 보이고 종교적으로 접근하는 학자들도 생겨나는 실정이었다.

 그러나 주자학을 내세우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이러한 사상들이 불온하고 특히 제사를 안 지내고 신주를 불태우는 행위는 “효” 사상을 무너뜨리고 나아가 “충”을 부정하여 결국 정치질서 붕괴와 왕권에 도전하는 불순세력으로 몰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결국 이러한 정치적 음모 속에 신유년 한해 동안 약 100여명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400여명이 유배를 떠나는 참극으로 이어졌으며 이 와중에 약전의 동생 약종을 비롯하여 약전의 친구이자 과거 시험관이었던 성호 이익의 종손 이가환, 약전의 매형이고 이가환의 조카 이승훈 등이 목숨을 잃는 비극적 사건이 발생하였었다.

 

이번에 <흑산도 하늘 길>을 읽고 약전의 행적을 자세히 더듬을 수 있어 재미있었는데 사실 이 소설의 주인공 약전은 동생 약용에 비해 학문을 바라보는 태도나 근면함, 끈기 등에서 뒤떨어지며 4살 아래 동생인 약용보다 과거도 늦고 벼슬도 아래였지만 그래도 동생 정약용에 대한 신뢰는 굳건하여 가문을 빛내줄 기둥으로 다산을 끔찍이 아꼈다.

 서울에서 출발한 귀양 마지막 길에 전남 율정에서 헤어져 약전은 흑산도로 약용은 강진으로 발길을 돌리면서 두 사람은 눈물의 이별을 했으며 약용은 수많은 서신을 통해 자신의 저술에 대한 자문을 구하고 서로 격려하며 귀양살이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큰형 약현을 제외한 약전, 약종, 약용 모두 천주학을 공부하며 천주교에 입교했으나 조정의 탄압에 다르게 처신하였다.

 즉, 약용은 천주학이란 학문에 관심뿐이었다고 자척상소를 올리며 배교했으나 악종은 주변의 간곡한 회유에도 흔들림없이 오히려 형과 동생의 배교를 대신하여 자신은 더욱 하느님을 믿으며 순교를 자청한 인물이다. 약전의 경우는 두 동생의 중간 입장을 취하였으며 이런 사실을 감안하여 자신보다 약용이 먼저 해배되리라 믿었고 또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기도 했다.

 

소설은 약전이 나주 다경포에서 유배지인 흑산도를 건너는 장면부터 시작하는데 먼저 큰 가오리가 새끼 가오리들을 데리고 하의도(김대중 전대통령 출생지) 방향으로 나아가는 형세라는 지금의 소흑산도인 우이도에 도착한다. 천주학쟁이는 마치 전염병을 지닌 사람처럼 멀리하는 섬사람의 눈총 속에  병조좌랑을 지낸 양반으로 자세를 흐트리지 않고 6년간을 살며 서당 훈장으로 의식주를 해결하다가 고아나 다름없는 “거무”라는 섬 처녀를 첩으로 받아들여 아들을 낳기도 한다.

 유배 7년이 되는 해 대흑산도에서 건너온 백면서생으로 화랭이란 별명이 붙은 장성호의 요청도 작용하고 자신에 대한 호감이 높은 대흑산도로 이사한다.

 여기서도 서당을 열고 섬 아이들을 가르치며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떠난 장성호의 아들 창대의 도움으로 서당도 번창하게 운영한다. 여기서 거무 사이에 둘째 아들을 보는데 첫째는 “무”라 지었으며 정식 이름은 “학도”이고 둘째는 “공”이며 “학매”라 이름 지었다.

 

 대흑산도에는 우이도와 달리 과거 자신의 양반 신분을 버리고 섬사람들과 허물없이 섞여 상민처럼 생활하는데 대쪽같던 양반 행실에 끌려 흠모하였던 거무는 저으기 실망하여 악전에게 마음을 돌리도록 부탁하지만 약전은 듣지 않는다.

 또 다른 변화는 조금씩 마시던 주량이 점차 늘고 특히 거무가 담아주는 대마잎으로 빚은 마주에 깊은 애착을 보이는데 사실 대마주는 취기와 함께 환각작용을 하여 약전의 머릿속과 온몸을 불처럼 밝혀 고단하고 억눌린 심신을 해방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 이 마주는 인간의 심신을 황폐시키고 결국 죽음으로 내몬다는 사실을 약전은 알고 있었으나 여기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이럴즈음 해양산물에 대한 관심을 자료로 정리하기 시작하는데 이런 결과물이 우리나라 최초의 해양동식물 연구서로 인정 받고 있는 자산어보(玆山魚譜)인데 대명사를 관형사로 읽을때는”자”라고 읽으나 검다라는 뜻일 때는 “현”이라 하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현산어보”라 해야 한다.

 아무튼 거무와 창대 그리고 동내사람들의 설명과 함께 약전이 하나하나 배를 갈라보고 형태를 기술하여 어류101종을 포함한 227종의 해양동식물에 대한 연구서 현산어보는 우리의 문화유산으로 귀중한 자료이다.

 

 사실 약전은 술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암울한 상황이었는데 남인벽파의 모함으로 귀양살이에 대한 분노와 출세 길에서 멀어진 좌절감 그리고 가족과 기약 없는 이별로 극도의 고독감과 함께 언제 정적들의 모략으로 내려질지 모르는 자신의 목숨을 빼았아 갈 사약에 대한 불안감으로 한날 한시도 마음 편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약전의 태도는 같은 입장의 약용에 비해면 인간적으로 다소 뒤떨어진다. 왜냐면 조금 죄가 가볍다고는 하나 똑같이 귀양살이를 하는 입장임에도 다산은 수많은 저술 활동과 주변 인물들과 비록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교유관계를 넓히며 자신의 학문의 폭을 넓히고 자신의 건강을 보전하여 장장 18년이란 인고의 세월을 견디고 드디어 해배되어 고향에 돌아와 뼈를 묻었기 때문이다.

 하기야 한 형제이지만 인간 됨됨이의 우열이나 개성은 다를 수도 있으니 약전을 비난할 수만은 없다. 결국 약전의 건강은 점점 기울지만 현산어보도 상당한 진전을 보이고 약전은  대흑산도 생활 7년을 맞아 다시 우이도로 이사하려고 마음먹는다.

 이주의 첫째 이유는 강진의 동생 약용이 해배되기라도 하면 자신을 찾아 올 텐데 대흑산도는 너무 멀어 뱃길이 위험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가까운 곳으로 가려는 애틋한 형제애의 소산으로 소설에 나타나고 있다.

 두 번째로는 아마도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거무와의 사이에서 낳은 어린 두 아들을 조금이라도 육지에 가까운 곳에 데려 가고 또한 자신도 고향에 한발이라도 가까운 곳으로 가고 싶은 수구초심의 심정이었으리라 생각된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대흑산도 생활 7년을 마감하고 우이도에서 3년을 지내던 어느날 어린 아들과 생활력도 약한 아녀자 거무를 남겨두고 정약전은 감겨지지 않는 눈을 감고 한 많은 이승을 떠난다.

 

 현산어보를 쓰는 과정에 약전이 알게 되는 작은 새 한 마리가 조개 속에 들어가 살다가 푸른 창공으로 날아간다는 승률조개와 파랑새 이야기는 조선시대 사대부 출신의 한 지식인이 자신의 이상을 펴보지 못하고 억압에서 자유로 비상하는 서사구조를 이루어 특별한 상징성을 띠고 있으며 실제로 남해지방에는 성게 종류인 승률조개가 바다 밑에 살고 있다 한다.

 

 약전이 죽기전 약전의 천주님을 향한 절절한 간구는 처절하여 읽는 독자의 가슴을 메이게 하여 아래 옮겨보기로 한다

 

 눈을 감은 채 '천주님!' 하고 속으로 불렀다. 진저리를 쳤다. 그의 아우 약종을 죽게 하고 그를 절해고도에 갇히게 하고 막내 아우 약용을 강진에 갇혀 살게 한 것이 천주였다. 한데 지금 죽음을 앞둔 그는 드높은 곳에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을 듯싶은 그분을 부르고 있었다.

 

'천주님, 이 죄 많은 저를 가엾게 여기시고 죽어 산화되기 전에 한마리 새가 되어 날아가게 해주시옵소서. 저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서 숨 쉬며 살게 된 거무와 두 자식을 데리고 강진으로 날아가서 사랑하는 아우를 만나 그동안의 회포를 풀고, 이들의 앞날을 부탁하고 난 다음 당신의 품으로 들어가 안식하게 하시옵소서. 저는 이제껏 검은 섬에 갇혀 저의 원죄를 갚을 만큼 갚지 않았사옵니까?'

 

 한동안 약전은 정적들에 의한 귀양살이 생활이 비록 육신은 흑산도에 묶여있지만 높은 꿈과 이상으로 자신은 자유인이라는 의식을 지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편 아쉬움으로 남는 사실은 인간적 강건함을 견지하여 기왕의 유배기간을 잘 활용하여 “현산어보”에 필적하는 또 다른 실학에 바탕을 둔 연구서 집필이라든가 후대에 높이 평가 받을만한 저술을 하였더라면 아우 약종과 함께 쌍벽을 이루며 약전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달라질 거라는 조금은 무리한 독자 입장의 생각을 해보기도 하며 조선 시대의 한 지식인의 몰락에 대해 가슴 아프게 생각하며 책을 덮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