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나의 도시>를 읽고...
정이현
문학과 지성사
2013. 07. 04.
나는 최근 읽다가 내려놓은 책이 여러 권이다. 다른 사람들이 훌륭하다고 추천하여 골랐으나 술술 읽히지 않아 덮어 두다가 다시 읽어도 마찬가지인 경우가 흔하다. 내가 이런 책을 쉽게 읽지 못하는 것이 소양부족이라 생각되어 부끄러운 느낌이 들기도 하여 다시 꺼내 들기를 반복하다 어떤 책은 아예 처음부터 다시 읽기도 한다. 이럴 때 나는 가끔 시선을 돌려 통속소설을 골라 읽으면서 위기를 넘기기도 한다. 작가 정이현씨에게는 조금 미안한 이야기가 되겠는데 그래서 도서관 서가에서 뽑아든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어디에서 자주 보았던 이름 같아서 표지를 넘겨 작가 소개를 보니, 1972년 서울출생으로 단편 <낭만적 사랑과 사회> 단편집으로 2002년 제1회 신인문학상 수상으로 등단하였고 2004년 <타인의 고독>으로 이효석문학상을 비롯하여 엇비슷한 다른 문학상을 받은 것으로 나와 있다. 그러고 보니 어느 해인가 오래 전에 나는 <낭만적 사랑과 사회>를 읽은 기억이 나는데 너무 오래되어 장편이었는지 단편이었는지조차 분간이 되지 않고 내용은 모두 잊고 단지 제목만 기억난다.
사실 이번에도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이런 책을 읽어야하나 할 정도로 취향이 맞지 않았으나 한 번 시작하면 끝 페이지까지 읽는 습관 때문에 몇 차례 나누어 읽었다. 후회를 하면서 읽기는 했어도 2000년대 서울에서 살고 있는 30대 미혼여성들의 정신세계와 생활규범을 합법적으로 기웃거려 볼 수 있는 기회여서 나름 소득이 있었다.
주인공 오은수는 1975년생으로 작가 정이현과 동년배이니 작가의 성장소설이라 할 수 있다. 소설 배경은 2006년과 2007년 오은수가 30을 막 넘긴 31살과 32살 서울에서 직장생활하며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기업체 사보와 홍보 브로슈어 편집을 대행해주는 회사에서 8년차 실무경험을 한 오은수 대리는 서울 근교 부모 집에서 나와 이름은 제법 근사한 '스노 펠리스'라는 원룸에서 지내며 고등학교 시절부터 단짝인 친구 두 명 남유희와 하재인도 오은수와 크게 다를 바 없는 그만 그만한 인물들이다. 소설 한 권을 다 읽어봐도 오은수는 모든 것이 평범한 여자다. 외모, 학력, 직장, 재산, 가족배경 등이 길거리에서 만나는 대한민국의 30대 초반여성의 전형이다. 결국 이 소설을 통하여 이 시대 한 집단의 가족, 성, 사랑, 결혼에 대한 의식을 엿 볼 수 있다.
이 나이에 이르는 동안 오은수는 대충 대여섯의 남자들과 교제를 하며 마음이 맞고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키스에서 섹스까지 이어간다. 어느 날 남녀 여럿이 어울린 술자리에서 처음 만난 여섯 살 아래인 25살 되는 장래 영화시나리오 작가 지망생이라는 한태호와 어울리다가 얼마간 동거생활도 하였다. 그러나 막상 결혼 상대로는 장래성과 나이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여 고민 하던 중 직장 상사를 통하여 소개 받은 작은 비즈니스 사업대표인 김영수라는 30중반 남자와 밋밋한 만남을 지속한다. 한편 친구 남유희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두고 성형수술로 가슴도 키워 뮤지컬 배우 지망생으로 변신하고 하재인은 비뇨기과 의사와 전격 결혼을 하더니 곧바로 이혼을 한다. 친구들의 변화에 자극을 받아 소극적이었던 오은수는 남산 타워 스카이 레스토랑에서 김영수에게 청혼을 하고 역시 밋밋한 승낙을 받는다. 그런 다음 오은수는 술의 힘을 빌려 육체접촉을 먼저 시도하여 키스에 이르고 결혼식 날짜를 잡는 단계까지 이르렀으나 갑자기 김영수가 행방불명이 된다.
나는 읽는 동안 비록 세대 차이는 크지만 30대 초반 미혼여성의 결혼관, 성적 판타지, 남성을 보는 시각, 사회를 보는 관점, 친교관계 등이 대부분이 내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으며 오은수의 가족인 아버지, 어머니, 오빠, 시누이 등 비교적 단출한 관계에서도 이런저런 삐거덕 거리는 문제들이 드러난다. 또 이들이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딸에게 아버지는 최초의 남자이고, 아버지에게 딸은 최후의 여자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내가 과문한 탓인지 앞의 말은 대강 무슨 말인지 알겠는데 뒤의 말은 잘 모르겠다. 결국 이 가정도 아버지와 어머니의 별거로 끝맺어 한국사회의 쓸쓸한 모습을 보는듯하여 마음이 무겁다.
내가 의미 있게 읽은 대목 중 하나는 오은수가 친구 유희와 벌이는 남녀 간의 사랑에 대한 견해를 피력하는 부분에서 유희의 힐난에 오은수는 이런 결론을 내린다. "어쩌면 우리들은 사랑에 대해 저마다 한 가지씩의 개인적 불문율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닐까 싶다. 문제는, 자신의 규칙을 타인에게 적용 하려들 때 발생한다. 자신의 편협한 경험을 토대로 만들어진 기준을, 타인에게 들이대고 단죄하는 일이 가능할까. 사랑에 대한 나의 은밀한 윤리감각이 타인의 윤리감각과 충돌할 때, 그것을 굳이 이해시키고 이해받을 필요가 있을까." 어찌 인간사에서 사랑만이 그러하겠는가? 그래도 세상은 이런저런 사랑 없이는 존재하지 않으며 그 누가 남녀 간의 사랑의 규범을 타인에게 자신 있게 강제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소설내용이 30대 초반 서울의 한 직장 여성의 가정사, 친구들 이야기, 직장 이야기 등으로 기복이 없이 이어졌으나 결혼식을 얼마 남기지 않고 약혼했던 남자 김영수가 이유 없이 행방불명되어 연애소설에서 갑자기 미스터리소설이 되어가는 느낌을 받았으나 일주일 만에 김영수가 출현하여 다시 진부한 내용으로 돌아간다. 오은수는 회사에서 사소한 잘못으로 문책을 받고 사표를 내고 얼마간 쉬면서 자신이 지나 온 세월을 더듬어 보고 앞날을 예견해보지만 자신의 능력과 재능 그리고 모든 여건에 막막함을 느끼며 자의반 타의반 '오은수 편집회사' 대표라는 명함을 만들게 된다. 오은수는 절교를 선언했던 태호를 다시 만나러 지방의 영화 촬영지를 찾아가기도 하고 다시 나타난 김영수에게 자신의 심경을 밝히는 메일을 보내 짧은 답장을 받는다.
내가 보기에 이 소설에 등장하는 오은수를 비롯한 모든 인물 들은 사랑, 일, 가족관계에서 조차 한마디로 투철하지 못하다. 사실 현실적으로 지금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엇비슷한 것은 아닐까. 세상일이란 모두들 남과 똑 같이 한다면 결국 그 결과도 남과 똑 같아질 것이다. 사랑이든 일이든 열정을 바쳐 조금 과장하면 목숨을 건 노력을 기울 일 때 비로소 남다른 성과에 도달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최근 다시 읽은 <위대한 개츠비>에서도 비록 개츠비는 사랑을 되찾기 직전에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지만 사랑을 위해 비범하고 목숨을 건 노력으로 해협 건너 깜빡이는 초록 불빛을 바라 볼 수 있었지 않았을까 한다. 우리는 이 소설의 오은수를 반면 교사로 삼는다면 이 하찮은 통속소설도 읽느라 보낸 시간이 아깝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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