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후기

<프란츠 카프카의 비유에 대하여>를 읽고...

깃또리 2018. 5. 2. 12:27

<프란츠 카프카의  비유에  대하여>를 읽고...
Franz Kafka 지음/ 김성화 옮김
아름다운 날
2017. 07. 02.


 오랜만에 카프카의 글을 읽었다. 사실 카프카의 글은 어떤 흥미나 재미를 기대하기 어렵다. 한 마디로 어렵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꾸준한 인기를 누리는 이유 중 하나는 역설적으로 난해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 난해함 속에 감춰진 ‘비유와 은유 그리고 상징’들이 담고 있는 깊은 의미를 높이 평가하기 때문인 듯하다.  이런 경향은 비단 카프카의 문학뿐만이 아니라 모든 예술 작품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카프카의 장, 단편 소설이 어려운 판에 더구나 '비유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붙은 책이라 서가에서 뽑기가 망설여졌으나 '도전적 책 읽기'이라는 평소의 생각으로 용감하게 꺼내들었다. 역시 높은 산을 마주한 셈이었다. 책 앞표지의 제목 아래 "책은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라는 문구가 보인다. 옮긴이의 말인  <우리는 바벨탑 아래 굴을 판다>라는 제목의 해설에 의하면 1904년 카프카는 친구 오스카 폴락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써 보냈다 한다. "네 말대로라면 책이 우릴 행복하게 해주기 때문에 읽어야 하나? 글쎄, 책을 읽어 행복해질 수 있다면 책이 없어도 마찬가지로 행복할 거야. 그리고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이 책이라면 아쉬운 대로 자기가 써 볼 수도 있겠지.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책이란 우리를 몹시 고통스럽게 하는 불행처럼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사람의 죽음처럼, 자살처럼 다가오는 책으로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조끼여야 해."


 어려운 입장을 극복하고 장사로 재산을 모아 성공한 유태계 독일인 아버지 헤르만 카프카의 아들로 태어나 부친의 희망에 따라 법학을 공부하여 법학박사가 되고 법학국가고시에 합격하여 형사법원 법원시보로 시작하여 프라하 '보헤미아 왕국 노동자 재해보험공사에서 14년간이나 근무하였지만 자신은 ‘운명처럼 문학 외에는 더 이상의 희망이 없다’라고 생각했던 카프카의 문학 그리고 삶에 대한 생각과 의미의 단편들을 엿 볼 수 있는 책이다.  카프카는 42세라는 젊은 나이에 후두결핵으로 죽기 직전 절친한 친구 막스 보로트에게 사후 발견되는 자신의 모든 원고를 소각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나 브로트는 유고를 정리하여 1946년 1차로 6권, 1950년 2차로 9권의 카프카 전집을 간행하였다 한다.  나는 난해한 카프카의 비유에 대하여 뭐라 쓸 재주가 모자란다. 단지 각장 앞에 나온 인상 깊은 몇 개의 짧은 문장의 비유를 적어두어 후일 다시 읽고 싶을 뿐이다.


 "오로지 여기로부터 떠나는 거야, 오로지 여기로부터 떠나는 거야, 계속해서 여기로부터 떠나는 거야. 오로지 그것만이 내가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게 하지."
 "메시아는 그가 더 이상 꼭 필요하지 않아도 될 때야 비로소 재림할 것이다."
"이제 사이렌은 노래보다 더 무서운 뭐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녀의 침묵이었다."
"그건 시험일 뿐 이었다고,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 사람이 시험에 합격한 거지."


 위의 마지막 문장은 <하인>이라는 2페이지의 짧은 글 마지막 문장이다. "어느 집 하인이 술집에 들어가자 역시 하인인 어떤 사람이 술을 사겠다하며 자기 앞에 앉으라 했다. 그리고 질문을 하는데 대답할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질문이라 미안해서 자리를 뜨려하자 질문했던 하인이 했던 말이다. 


<언어>
 이 세상의 허다한 '말'과 '대답'의 무용하고 헛됨을 카프카는 이야기하고 싶어 한 것 같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도 터득해가고 있는 중이다. 역시 말, 언어에 관한 비슷한 맥락의 비유가 이어진다. "언어는 감각세계 외부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해서 암시적으로만 사용될 뿐 결코 거기에 근접하여 비교하며 사용될 수 없다. 왜냐면 그것은 감각 세계에 상응하여 소유와 그 소유관계만을 다룰 뿐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가급적 거짓말을 적게 할 때만 거짓말을 적게 하는 것이지 거짓말을 할 기회가 적어 거짓말을 적게 하는 것은 아니다."


<식사>
 "그는 자기 식탁에서 떨어진 쓰레기를 먹어치운다. 그래서 잠깐 동안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배를 채우지만 식탁 위의 것을 먹는 것을 잊어버린다. 그리고 그 때문에 떨어지는 쓰레기도 멈춰버린다." 지구상에서 가장 진화하였고 현명하다는 인간이지만 삶에서 무엇이 중요하고 가치 있는가를 구별하지 못하거나 잊는 경우가 허다하다. 예를 들면 대량 살상무기를 만드는 돈과 시간의 몇 백분의 일을 아프리카 기아 난민을 위해 쓴다면 수 많은 사람을 먹이고 치료할 수 있을 텐데 같은 인간은 동족의 살육 준비에 골몰하고 있다. 개인 역시 삶에서 무엇이 우선인지를 모르거나 뻔히 알고도 주변의 시선을 중시하거나 영향을 받아 눈을 감는다. 카프카의 날카로운 지적에 다시 한 번 깊이 자신에 대하여 성찰할 일이다.
 
<이방인>을 쓴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알베르트 카뮈가 카프카에 대해 쓴 글의 울림이 강하여 덧붙여 옮겨본다.


 "카프카 예술의 요체는 독자로 하여금 다시 한 번 더 읽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데 있다. 작품의 결말 또는 결여는 여러 가지 설명 방법들을 암시해 주지만 이 설명들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 것은 아니어서 그것이 설득력 있게 되려면 이야기를 새로운 각도에서 다시 한 번 읽지 않으면 안 된다. 때로는 이중의 해석이 가능하여 그러기에 두 번 읽어야 할 필요가 생긴다. 이것은 곧 작가가 노렸던 것이다. 그러나 카프가의 작품을 세부까지 다 해석하려는 것은 잘못이다.  상징은 항상 일반적인 것 가운데 있으며 상징에 대한 해석이 아무리 정확한 것이라 할지라도 예술가는 그 속에 전체적인 움직임을 재현해 놓은 것에 불과하다. 즉 한마디 다 맞아 떨어지게 옮겨 놓을 수 없는 것이다. 사실 상징적 작품보다 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없다. 상징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을 초월하여 사실상 그가 의식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 이상을 말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