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품 감상기

<불멸의 화가 반 고흐> 미술전시회를 보고...

깃또리 2008. 3. 5. 19:51

<Voyage into the Myth, 불멸의 화가 반 고흐> 미술 전시회를 다녀와서...

서울시립미술관

2008. 02.

 

 

 거의 1년 이상을 기대하던 반 고흐 그림 전시회가 지난해 11월 문을 열었으나 곧 초등고등학교 겨울 방학이 겹쳐 긴 겨울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이렇게 기다렸으면 봄방학까지 피해야 하는데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지난 토요일 아침 식사를 하고 서울 시립 미술관에 10시에 도착하였는데 매표소 앞에 긴 줄을 보는 순간 다음에 다시 올까 했으나 발길을 돌리지 못하고 표를 구입하고 다시 긴 줄을 서서 약 30분 후에야 전시장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사상 최대 규모의 반 고흐전이라는 광고를 보았는데 아마 국내 전시 사상 최대 작품 전시회라는 이야기 이리라 생각하며. 유화 45점 드로잉과 판화 22점을 합하여 67점이라면 앞으로 상당기간 이렇게 많은 작품을 서울에서 보기가 어려울 것이다. 이번 전시품은 반 고흐의 작품 약 반을 소장하고 있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반 고흐 미술관과 크륄러 뮐러 미술관의 소장품들이라 한다. 그러나 다른 미술관에서 전시하고 있는 해바라기를 비롯하여 여러 점의 잘 알려진 그림은 볼 수 없었던 게 조금 흠이었다.

 

또한 이번 전시회 광고에서 반 고흐의 5대 걸작 중에서 2점이 포함되었다고 하였는데 반 고흐의 5대 걸작이란 게 사람들의 주관에 따라 다를 뿐 아니라 기준 또한 모호하여 어떤 그림인지 궁금하기도 하였다. 일반적으로 반 고흐의 그림에서 해바라기 연작들 중에서 하나, 여러 점의 자화상 중에서 몇 점, 아이리스, 밤의 카페테라스, 화가의 방, 별이 빛나는 밤에, 가쉐 박사의 초상화, 추수, 씨 뿌리는 사람, 까마귀가 나르는 밀밭, 감자 먹는 사람들 등을 그의 걸작으로 보는데 이번 전시회를 돌아보니 <씨 뿌리는 사람>, < 꽃병에 꽂힌 아이리스>,  <밀짚모자를 쓴 자화상>이 포함 되었다. 아마 이 3점 중에서 두 점을 걸작으로 간주하는지 모르겠다.

 

전시회 구성은 가난한 농촌 생활을 그려서 인류애를 실현하며 화가의 길을 택한 초기인 네덜란드 시기(1881~1885)부터 시작하여, 자신의 화풍을 세우기 시작한 파리 시기(1886~1888), 화가 공동체를 꿈꾸며 밝은 색체를 사용하여 빛의 시대를 마음껏 구가한 아를르 시기(1888~1889), 불타는 예술혼으로 자연을 통하여 분출한 셍 레미 시기(1889~1890), 그리고 생의 마지막을 불같이 보낸 70일간의 오베르 쉬르 우아즈 시기(1890)로 나누어 이루어졌다.

 

2층은 네델란드, 파리, 아를르 시기의 전시장이고 3층은 셍 레미, 오베르 시기 그리고 종이 작품과 입구에는 비디오 룸에서 그가 태어난 네덜란드의 준데르트 고향 모습 사진과 아를르의 <노란 집> 과 밤의 카페테라스의 배경이 되었던 지금은 고흐의 카페라고 이름 바꾼 카페 등을 보여준다. 반 고흐가 2 달 조금 넘게 사는 동안 마지막 생의 처절한 예술혼을 발휘하였던 파리의 북쪽 한적한 마을 오베르 쉬즈 우아즈의 가세 박사의 집과 고흐가 머물던 나부 여인숙의 다락방 그리고 <까마귀가 나르던 밀밭>의 배경이었고 그의 죽음으로 이어진 권총 자살을 시도하였던 마을 뒤 밀밭을 보여주었다. 끝 부분에서 반 고흐가 죽은 뒤 6개월 후에 삶을 마친 그의 동생 테오는 평생 사랑하였던 그의 형 반 고흐와 함께 나란히 묻혀 죽어서도 형제애를 이룬 무덤과 비석을 보여 주어 더욱 처연한 생각이 들게 한다. 반 고흐는 해바라기, 아이리스도 좋아했지만 사실 담쟁이넝쿨도 좋아하여 그의 무덤 가에는 담쟁이넝쿨이 싱싱하게 자라고 있어 죽은 화가의 영혼을 감싸고 있다고 한다.

 

이번 전시장에서 그의 중요한 그림에 대하여 소개를 덧붙이자면...

 

네델란드 시절

 

제일 먼저 19세에 찍은 빈센트 반 고흐의 사진이 나온다. 빈센트는 사진 찍히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그 이후의 사진은 볼 수가 없다. 다음에는 그의 부모, 형제, 그리고 고갱과 그의 아이들 그리고 테오의 부인 이자 빈센트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였던 제수씨 요안나 봉허와 역시 빈센트 사후 그의 그림 보관과 정리에 힘을 쏟고 반 고흐 미술관에 고흐의 많은 그림을 영구 기증하였던 테오의 아들이자 빈센트의 조카 빌렘 반 고흐의 사진이 걸렸다. 보기 드문 사진으로는 반 고흐가 사랑했던 미망인이자 사촌인 케이 보스 스트리커의 사진이 있어 흥미로웠다. 사진 다음으로 빈센트의 긴 연보가 나오고 그의 그림으로 제일 먼저 한동안 같이 지냈던 창녀 시엔이 얼굴을 팔로 감싸며 머리를 수그리고 앉아 있는 Sorrow 라는 글이 적힌 연필로 그린 나체화  <슬픔>이란 제목으로 걸렸다. 두 번째가 <감자먹는 사람들>인데 유화를 그리는 도중에 석판에서 뜬 석판화라서 원래 그림에 비해 좌우가 반전되었고 그림 크기도 작아 조금 실망하게 된다. <베틀과 여인> 그림은 헤이그 체류 시절 그림이며 반 고흐의 초기 시절 그림이지만 내 눈에는 퍽 수준 높은 그림으로 보이고 Mono Tone 으로 보기에 좋았다.

 

파리시절

 

예술의 도시 미술의 도시 파리에 도착하여 화상인 동생 테오와 함께 살면서 고흐는 당대의 여러 자유분방한 화가들과 교유하였고 탱기영감의 가게에 부지런히 다니면서 그림 수업에 힘을 쏟았지만 모델료가 없어 정물 특히 꽃 그림을 많이 그려 <수레국화, 양귀비, 카네이션, 데이지가 꽂흰 푸른 화병> 그리고 19세기 예술가들이 자주 마셨다는 도수가 높은 값싼 술 압생트를 반 고흐도 좋아하여 <압생트 술병과 잔> 그림이 보인다. 고흐와 친구로 지낸 로트 랙은 <압생트 잔을 앞 에둔 반 고흐>라는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다 한다.  반 고흐는 어릴 때부터 많은 책을 읽었으나 그를 소개하는 많은 책들은 그림 이야기에 휩쓸려 별로 중요하게 언급하지 않고 그는 그림에 대한 천재며 광인이었다는 것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천재가 아니고 책에서 얻은 지식과 깊은 성찰로 인간에 대한 사랑과 특히 어려운 삶을 살아가는 광부, 농부, 여성들에 대한 깊은 애정과 연민을 가지고 자신의 그림 모델로 삼았던 박애주의자였으며 교양을 갖춘 화가였다.

 

그는 작가 에밀 졸라를 좋아하여 그의 작품을 섭렵하였으며 플로베르, 드 콩쿠르, 위드 망스, 톨스토이와 같은 당대의 프랑스 현대문학가와 러시아 문인들에 매료되었었다. 그래서 그의 인물 초상화 앞에는 당시 그가 읽던 책을 그린 경우가 많다. 이번 전시에는 볼 수 없지만 <아를르의 여인>이란 그림 앞에도 책이 보이기도 한다. 이번 전시실에는 <파리의 소설책>이 걸렸고 반대편에는 파리 시절 그린 <밀짚모자를 쓴 자화상> 이 걸렸다. 반 고흐는 모델료를 아끼려고 자신의 거울에 비친 모습을 주로 그렸는데 평생 40점이며 이번 전시된 자화상은 기법이나 완성도는 잘 모르겠지만 인물과 배경이 노란색으로 붓질도 성기어서 내 눈에는 완성도가 떨어지게 보이고 물감도 퇴색하게 보였다.

 

아를르 시절

 

반 고흐가 남프랑스 지역인 프로방스의 아를르로 간 이유는 몇 가지인데 첫째 답답한 도시 파리를 벗어나고, 화가 공동체에 대한 열망, 당시 유행처럼 번지고 있던 일본에 대한 동경, 그리고 자신이 존경하는 화가 몽티셀리와 가까이 지내기 위한 희망 등이 겹쳐서 1888년 봄에 도착하였다.  처음에는 호텔에서 지내다 작은 집을 얻어 수리를 하고 ‘작은 노란 집’이라고 이름 붙이고 고갱을 기다리며 그를 위해 해바라기 연작을 제작하였다. 이번 전시회에는 이 유명한 <노란 집>이 걸렸는데 코발트 하늘 아래 노란 집의 창문은 청록색으로 칠해져 지금은 낡고 퇴락하여 사뭇 다른 느낌을 주지만 그림은 밝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이 시기에  <꽃 핀 복숭아나무> 그림을 그렸는데 아직 활짝 피지 않고 꽃봉오리만 맺힌 그림이며 후일 반 고흐는 활짝 핀 복숭아나무 그림도 그렸었다. 반 고흐는 고갱과 함께 아를르에서 출발하여 지중해 지방을 처음으로 여행하였는데 이번 전시회에는 <생 데 마리 드 라메르>라는 지중해 지역 시골 마을을 원경으로 하고 근경에 밭을 그린 그림과 지중해의 흰 파도가 거품을 드러내는 <바다>라는 그림이 걸렸다.

 

지중해 여행 그림 다음으로 앞서 이야기한 반 고흐의 5대 걸작에 자주 거론되는 <씨 뿌리는 사람>의 그림 보였다. 나는 이 그림을 다시 보고 또 보았다. 약 30호 정도 되는 이 그림은 내가 빈센트의 그림을 처음 보고 반 고흐를 좋아하게 된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중학교 1.2학년으로 기억되니 아마 1964년 12월쯤이 아닐까 한다 왜냐면 이때쯤 집집마다 다음 해 켈린더를 안방이나 거실에 붙이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내 기억으로 서울 어느 중앙은행의 달력이었는데 12장 모두가 반 고흐의 유명한 그림들이었으며 당시 학교 미술책에는 소위 천연색 사진이 아니었고 흑백이었으나 이 달력은 당시로는 최고급 종이에 인쇄도 훌륭한 한마디로 내 눈을 확 잡아 끄는 호화로운 달력이었다.  이 그림 중에서 특히 <씨 뿌리는 사람>과 <추수> 그림은 가장 인상 깊었으며 반 고흐를 좋아하는 계기가 된 그림이기도 하다. 그동안 십 대와 이십 대는 허겁지겁 삶을 모색하는 기간으로 세월에 떠밀려 지내다 30대 에 들어서서 미술관 나들이도 하게 되고 화집도 살만한 여유가 있었다 특히 해외 근무 당시에 구입한 화집은 많은 도움이 되기도 하였으며 생전 처음 유럽의 미술관에서 반 고흐의 그림에 가깝게 다가갈 수 있었다.

 

이제 44년이란 세월이 훌쩍 지나 시골 소년의 눈에 비쳤던 반 고흐의 씨 뿌리는 사람의 인쇄 화가 아닌 화가가 이제 방금 붓질을 마친 듯한 생생하고 힘찬 붓 터치가 오롯한 그의 그림을 마주하니 감개무량하여 발길을 돌리기 힘들었다. 반 고흐는 프랑스의 자연주의 화가 프랑수와 밀레를 가장 존경하여 그의 그림을 여러 점 모사하였으며 이 씨 뿌리는 사람 또한 밀레의 그림에서 영감을 얻었으며 당시 파리에서 유행하던 점묘법을 받아들인 기법이기도 하다.  그림을 그린 시기로 보면 밀밭은 실경이고 사람은 상상이라는 게 미술사가들의 일치된 의견이라고 한다.  아무튼 이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지평선 위의 노란 태양과 힘차게 씨를 뿌리는 농부의 모습에서 나는 유년시절의 아득한 과거로 회기 하는 아스라함을 느끼며 다음 그림으로 발길을 돌렸다.

 

<우체부 죠셉 룰랭>란 그림은 모자에 Postes가 있어 우체부라는 명칭이 있는데 사실 죠셉은 우체부가 아니고 우편물 저장 관리인이라고 하며 공화정치성향과 어느 정도 교양을 쌓은 사람이어서 반 고흐가 친하게 지낸 사람이라고 한다. 이 인물화는 1887년에 그렸는데 1889년에 이전 그림을 보고 다시 그렸으며 이 그림을 그릴 당시 룰랭은 이미 마르세이유로 이사하였다고 한다. 반 고흐는 그의 초상화를 6점 그렸으며 그의 가족들도 그렸으며 바로 옆에는 그의 아들 <까미유 룰랭>이란 그림으로 베레모를 비스듬하게 쓴 그림이다. 반 고흐는 고대하던 고갱을 맞았으나 이런저런 의견 차이로 다투기도 하고 급기야 면도날로 자신의 귀를 자르는 자해사건도 일으켜 고갱은 파리로 떠나면서 반 고흐의 정신질환은 더욱 심해져 1889년 5월 병원이 입원하였다.

 

셍 레미 시절

 

발작이 심할 때는 붓을 잡을 수 없었으나 정상상태에서 이르렀으나 밖에 나가지 못할 때조차 창문 쇠창살 사이로 보이는 야외 모습을 그리기도 하고 호전되면 이젤을 들고 병원 주변으로 나가 모든 것을 잊고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여 짧은 기간에 수 십 점의 그림을 제작하였다. 이 시기에 그린 초록빛이 현란하게 어우러진 오른쪽 정원과 병원의 벽이 왼쪽에 조금 나타나 있는 <생 레미 병원의 정원>은 반 고흐 자신도 만족하게 생각하여 당시 잘 넣지 않았던 자신의 서명을 적었고 <프로방스의 시골길 야경>이란 그림은 그가 좋아하였던 소재인 밀밭, 초가집, 싸이프러스 나무, 별이 빛나는 하늘 등이 모두 나타나는 의미 있는 그림에 속한다. 그러나 내 눈에는 그림이 너무 밝아서 하늘의 초승달과 별이 보이지 않는다면 마치 환한 한낮의 그림으로 보인다. 고흐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시기별로 나타나는 자연의 소재를 파악할 수 있다. 즉, 네덜란드 시기에는 가지 친 버드나무, 아를르 시기에는 과수원, 밀밭, 셍 레미 시기에는 올리브 과수원, 싸이프러스 나무, 초가집 등이 자주 등장한다.

 

반 고흐는 다른 화가들이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던 소재인 신발을 여러 점 그렸는데 자신이 유년시절부터 걷기를 좋아하여 굳건한 대지 위에서 활동하는데 없어서는 알 될 신발에 대한 애착이라는 설명과 고단한 사람들에 대한 애정표현이라는 설이 있다. 이번 전시회에도 <가죽 나막신>이 전시되었는데 셍 레미에서 그린 것이고 파리에서 5점, 아를르에서 1점을 그려 모두 신발 그림이 7점이라고 한다. 생 레미 근처의 알피유 산을 그린 <산이 있는 밀밭>은 반 고흐 편지에 의하면 캔버스가 살 돈이 없어 할 수 없이 식탁보에 그림을 그렸으며 그래서 자세히 보면 식탁보 바탕 무늬가 보인다는 가슴 아픈 사연이 있는 슬픔이 담긴 그림인데 그러나 이제는 물감이 퇴색하여 더욱 애처로운 느낌을 자아내게 하는 그림이다.  반 고흐는 유독 30호 규격의 그림을 많이 그렸는데 <올리브 나무의 두 여자>도 역시 30호 크기로 셍 레미에서 올리브 과수원 그림을 15점이나 그렸다고 한다.

 

반 고흐의 걸작에 속하는 <꽃병의 아이리스>는 1990년 셍 레미를 떠나기 직전에 제작하였다 하며 대칭구도를 깨기 위해 오른쪽에 축 쳐진 꽃 대궁을 그렸다. 나는 <씨 뿌리는 사람>과 함께 <아이리스>도 좋아하는데 사실 꽃병의 아리리스 보다 <야외의 아리리스>를 더 좋아한다. 뒤 돌아보니 어언 15년 전일인데 내가 책임자로 일하던 현장의 식당 벽에 아리리스 그림을 2년 넘게 걸어 놓아 아침저녁으로 보았던 일이 있다. 당시 아이리스가 우리말로 붓꽃이며 유럽의 아이리스도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나라마다 품종이 다르다는 사실도 알았으며 아마 고흐가 그린 아이리스는 당연히 프랑스 품종 이리라 생각하기도 하였었다. 반 고흐는 바로 앞 세대를 살았던 프랑스의 가장 위대한 낭만주의 화가로 불리는 들라크루아를 퍽 좋아하였다. 들라크루아의 색체 사용법은 인상파와 후기 인상파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 반 고흐는 그의 모작을 몇 점 그렸으며 <착한 사마리아 인>과 <피에타>가 이번 전시회에 출품되었다. 성경을 수십 번 읽고 한 때 성직자까지 되려 했던 반 고흐는 종교화는 많이 그리지 않았지만 성지자와 고위 관리는 외면하는 어려운 여인을 이교도가 구하는 내용의 성경 이야기에 감동하여 들라크루아의 그림에서 영감을 받아 이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종이 위의 작품실에 몇 점의 수채화와 목탄 밑그림에 검정 초크를 사용한 데생들을 볼 수 있으며 밀레의 그림에서 영감을 받은 가난한 농부와 여인들과 풍경화들이 그의 혼을 나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