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후기

우리나라 풍수답사기<왕릉>

깃또리 2007. 8. 8. 14:53
 

우리나라 풍수답사기 왕릉

왕릉이야말로 조선 산 역사다.

장영훈 글, 사진

도서출판 담디

2007.07.20.




 수년전 식사자리에서 예전 직장 선배 한 분이 왕릉에 특히 조선 왕릉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들려주었으나 당시에는 무심코 들었고 가끔 왕릉 몇 곳을 둘러보았어도 크게 관심을 가지고 보지 않았었다. 또한 그 동안 자동차를 타고 가면서 마주친 동구릉, 서오릉, 서삼릉 등의 표지판을 보면서도 방위와 왕릉 숫자에 연유한 지명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선릉, 홍릉, 태릉, 정릉, 공릉이란 명칭은 모두 왕릉에서 유래한 사실 정도는 알고 지냈는데 정릉은 어느 왕의 묘일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었다. 왜냐면 그 곳에 왕릉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저자 장영훈은 본적이 독도라고 간단히 밝히고 있는데 동해의 독도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을 테고 아마 주소를 독도로 옮겨서 자신의 본적을 삼고 있는듯하며 젊은 시절 출가하여 산사생활 중에 풍수에 입문하여 한국 최초 풍수교수로 되었으며 강의와 저술활동을 겸하면서 지금은 지리산 자락에 삶의 터전을 삼고 있다고 하는 특이한 사람이다.

 조선왕조실록을 자료삼아 서울을 중심으로 산재한 조선 왕릉에 관한 이야기를 쉽고 재미있게 썼다. 사실 별다른 지식 없이 왕릉을 지나쳤지만 책을 읽어 나가자 동구릉 지역에 묻힌 태조 이성계의 무덤을 예로 들어 왕릉위치 평면도와 함께 왕릉에 관련한 용어를 자세히 설명하여 앞으로 왕릉 답사에 요긴하다고 생각하였고 처음 보는 어휘도 있어 많은 공부가 되었으며 앞으로 답사에 유익할 것 같아 적어 보았다.


: 왕릉에 생기 공급을 한다는 산줄기 봉우리

곡장 (曲墻) : 봉분의 뒤와 옆의 담장

봉분 (峯墳) : =능침(陵寢)

석물 : 석호 호랑이

       석양 (石羊) : 왕의 잠자리 수발하는 내시

       망주석(望柱石):곡장과 봉분 사이의 생기 유출을 방지하는 역할의 돌기둥

       석상(石床) :=혼유석 상석이 아니고 왕의 혼령이 앉는 의자

                    상석은 일반 평민들의 묘 앞에 음식을 놓는 돌로 된 상.

능원 : 문인석; 조선시대는 문인 우월시대여서 무인석보다 위에 있음.

       장명등(長明燈)=석등: 불교의 영향으로 사찰 앞에 놓였던 석등의 영향으로 설치.

       정중석(定中石)=배례석: 무인석 사이에 설치하였으며 왕릉에 참배하는 사람이 서 있는 자리 표시석.

       무인석

강(崗) : 능원 아래의 둥근 언덕

예감 : 축문 태우는 곳

비각 : 신도비 집

망료위 : 축문 놓는 곳

정자각 (丁字閣) 제사상 차려 놓고 절하는 집 <정전+월랑> 동쪽 계단 신도+어도 서쪽 계단 어도만 존재한다.

수라청 : 제사 음식 간수하는 곳

참도 : 왕릉으로 가는 길

수직방 : 무덤 관리실

판위 :

홍살문

금천교


 이성계가 전주이씨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어떻게 함경도의 함흥이 고향이 되었는지 알지 못했는데 이 책에 자세히 나와 있다.

이성계 5대조 이안사는 전주감영의 아전이었는데 성질이 불같았으며 자신의 애첩을 전주감영사또에게 빼앗기자 그를 두들겨 패고 식솔을 거느리고 야반도주하여 삼척에 다달았는데 얼마 후 사또가 삼척으로 부임하자 다시 당시 여진족이 세력을 부리던 함흥으로 도망갔다 한다. 그 곳에서 가문을 다시 일으키고 후일 이성계가 태어났다 한다.

 이런 연유로 이성계가 아들 방원이 일으킨 왕자의 난에 고향 함흥에 칩거하여 아들이 보낸 심부름 하는자를 오는 족족 죽여 함흥차사란 말이 나온 배경은 대부분 다 아는 사실이고 이성계가 죽기 전에 자신의 무덤을 함흥에 쓰고 싶었으나 태종은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하여 지금의 동구릉에 묘를 정하고 봉분에 함흥옛터에서 자라는 억새를 가져와 입혔는데 그래서 지금도 태조 이성계 무덤에는 잔디가 아닌 억새가 자라고 있다는 퍽 재미있는 이야기가 사진과 함께 나온다.


 책을 읽다보니 특정 지역의 음식에 관한 유래도 심심치 않았는데 즉, 정조 임금이 수원화성을 축조하고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조성하면서 소를 잡아 제사를 지냈던 역사적 사실이 수원 갈비의 연원이라고 하며 마찬가지로 태릉갈비도 중종의 부인이자 명종의 어머니로 욕심꾸러기였던 문정왕후의 묘인 태릉과 관련이라고 한다. 왜냐면 소는 아무 때 잡을 수 없고 왕릉 조성사업이나 제사 기간에만 허용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남한산성, 부산의 금정산성의 산성막걸리가 지금도 명맥을 유지하는 데는 당시 성 쌓기에 동원된 역군들을 위하여 부근에 막걸리 제조소를 만들어 공급하였던 역사적 사실에 연유한다고 한다.


 책에서 얻은 지식으로 몇 가지 특기 할 사항을 적어 본다.

사람이 사는 양택에 속하는 집의 풍수는 좌청룡 우백호를 중시하지만 음택인 무덤은 강과 잉이 더 중요하다고 한다.

 정조는 28살에 한여름 뒤주에 갇혀 죽은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처참한 일을 11살의 나이에 경험하고 자랐으며 그래서 자신의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붙인 할아버지인 영조가 죽기 전에 서오릉의 자신의 먼저 간 부인의 옆에 자리를 잡아 소위 우허제를 음택으로 잡았었으나 원한에 사무친 정조는 영조가 죽자 정반대인 동구릉에 묻었다고 한다. 더구나 그 자리는 100년 전 효종이 묻혔다가 파묘한 김 세 버린 자리라고 한다. 물론 후세의 우리들은 조선 5백년간 통틀어 영정조시대가 문예부흥 시대라고 부르며 영조와 정조를 한 묶음으로 생각하지만 영조와 정조의 관계는 이렇듯 험악함을 나는 이 책을 통하여 처음 알았다.


 왕이 승하하면 능호와 종묘에 올리는 묘호를 정하는데 결국 살아서 자신의 묘호가 어떻게 될지를 모른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묘호는 어느 정도 객관적인데 지금까지 종은 평화시대의 왕이고 조는 외침이나 내란 등으로 시끄러운 시대의 왕에 붙였다고 알려져 왔는데 저자의 견해는 달랐다. 즉 조는 세조를 제외하고 선조, 인조, 영조, 정조, 순조 등이 모두 후궁 소생의 왕이라고 한다. 단 예외가 있는데 철종과 고종이 사실은 철조, 고조여야 한다고 한다. 사실은 선조, 인조, 영조, 순조 등이 무두 묘호를 처음엔 종으로 하여 영종, 정종, 순종, 헌종, 철종, 고종, 순종으로 하였다가 3대가 지난 나중에 바꿨는데 철종과 고종은 이미 조선역사가 기울 데로 기울어 3대후에 고치고 말 형편이 못되어 그냥 종으로 남았다고 한다. 치세업적이나 덕망 있는 왕이 종이라는 지난 교육이 잘못이라 주장하는데 조금 일리가 있게 생각되었다.

 앞서 말한 정조 임금은 세자시절 할아버지 영조 밑에서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자랐다 하며 한때는 역모사건에 휘말려 아버지 사도세자와 같이 죽을 처지까지 당하였다 한다. 그래서 정조는 참고 기다리고 주변을 경계하는데 달인이었고 임금 자리에 앉아서도 매사에 용의주도하였으며 아버지의 복수를 갚는 일도 신중에 신중을 기하여 아버지 죽음에 크게 관여한 사람 몇으로 끝내고 사도세자 묘를 천도하는 구실로 정적들에게 이장비를 감당하도록 하여 결국 재산을 고갈시키는 방법으로 자신의 반대세력을 무력화 하는 노련한 방법을 구사하였다 한다.

 이 당시 조성된 수원화성은 가장 기록이 풍부한 조선시대 시설물이며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자랑스러운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특히 수원화성은 우리의 삶에 동떨어진 문화재가 아니고 아침저녁 다가가 친밀하게 바라보며 노닐 수 있는 시설이며 구조물이다, 최근 수원화성을 따라 산보하기에 좋은 길도 만들고 밤에는 조명도 아름답게 설치하여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는 문화가 깃든 산책길이기도 하다.

 저자의 조사에 따르면 사도세자의 묘 이장비로 거둔 돈이 당시의 돈 18만 냥으로 지금으로 치면 약200역원이며 수원읍치 이주비용으로 87만 냥 (현재 약1000억원)을 대개 벽파군문에게서 거두었다 한다. 이 자금으로 이주비도 충분히 조달하고 백성들에게 노역비도 제대로 지불하여 원성을 사지 않고도 대규모사업을 마쳤다고 한다.


 저자는 정조에 대한 열광적인 존경을 나타내는데 그 한 예 중에는 영조왕릉부터 문인석과 무인석 사이에 있던 장대석을 없애버린 것은 실학에 바탕을 두었던 깊은 의미로 해석하는 정조임금에 깊은 존경을 보내고 있으며 정조의 죽음으로 다시 수구보수양반들에게 권력이 돌아가 결국 우리의 조선 역사는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들어섰다고 진단하고 있다.


망주석의 한 면에 양각된 세호에 대하여 자세히 언급하였는데 망주석이 좌우에 두개가 있으니 좌우의 세호가 위로 올라가는 자세인지 아래로 내려가는 자세인지에 대하여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였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동구릉의 명성황후 왕릉 유적지에 대하여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였다.

극악무도한 일본 낭인들에 의해 경복궁 건청전에서 시해되어 시신조차도 불에 태워진 고종의 부인이자 국모인 명성황후의 장례식은 국장선포도 늦게 이루어져 50여일이 지난 후에 이루어졌으며 처음에는 동구릉지역으로 정해져 100여 일간이나 묘역공사가 이루어진 사실이 조선왕조실록에 나와 있다고 한다.

그러나 무슨 이유인지 동대문구 청량리(현 세종대왕기념관)의 홍릉으로 묘역이 정해졌다가 1919년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그해 승하한 고종과 합장이 되어 지금의 홍유릉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저자는 동구릉에 틀림없이 당초의 묘역공사에 사용한 석물들이 존재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조선 풍수시각으로 최초 명성황후 무덤자리를 동구릉 관리소장에서 알려주었는데 거의 정확하게 그 자리에서 석물들인 난간석, 석주들이 발견되고 강과 잉도 뚜렷이 나타났다고 한다.

즉, 전통시각으로 풍수를 이해하는 것이 우리나라 왕릉을 이해하는 지름길이라는 사실을 힘주어 말하면서 대한민국의 바람직한 역사상은 제22대 정조임금의 왕릉에서 들어있고 최악의 역사는 고종과 순종왕릉이 보여주고 있다고 주장하며 책을 마무리하고 있다.


 저자의 쾌도난마식 주장에 약간의 의심도 가는 부분이 있으나 아무튼 왕릉에 대하여 문외한인 사람들에게 간단하고 명료하게 왕릉풍수에 대하여 안내를 해주어 고맙게 생각하며 책을 덮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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