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후기

<신 열하일기>를 읽고...

깃또리 2008. 5. 11. 13:08
<신 열하일기>를 읽고...

신원문화사

이규태지음(1933~2006)

2008.02.04.









이규태씨는 전북 장수 출신으로 연세대를 졸업하고 26세에 조선일보에 입사하여 작년까지 근무하다 작고한 언론인이다. 50년 이상을 한 직장에서 일한 보기드믄 인물로 나도 이십대 후반쯤 부터 그의 칼럼을 즐겨 읽기 시작하였으며 책으로 간행된 신문칼럼 '한국인의 의식구조> 上下권이 가장 인상 깊다. 신문 중간 아래부분에 수평으로 길게 자리잡은 지금은 제목을 잊은 일일 고정칼럼은 신문을 집으면 제일 먼저 읽는 부분이었고 시류에 일치하는 순발력이 뛰어나고 흥미있던 내용으로 조선일보의 인기를 올리는데 톡톡히 한 몫을 하였다.

해외 여행이 제한되었던 시절 이규태씨는 언론인 신분이라서 세계 구석구석을 자유롭게 여행하며 예리한 관찰력과 분석으로 자신의 견해를 더하여 문화 인류학적인 글을 쏟아내었으며 지금까지 내가 얻은 지식의 상당 부분이 그의 칼럼으로부터라고 솔직히 고백한다. 작년 그의 부음소식을 듣고 퍽 애석하게 생각하였으며 그가 장수출신이기에 더욱 많은 상념이 교차하였다.

몇 년 전에 연암 박지원에 관한 글을 읽고 올해 들어 마침 그의 저작<열하일기>를 다시 읽었었는데 바로 이규태씨의 <신 열하일기>를 읽다 보니 마치 연암의 열하일기의 해설을 읽는 기분이어서 마음이 편하였다. 왜냐면 연암의 글에서 미처 확실한 사정을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이규태씨의 글에서는 친절하게 부연 설명되었고 연암의 사행길을 의주에서 압록강 건너 바로 닿는 중국땅 구룡연부터 작은 지도를 보여 주며 북경 목적지까지의 연암의 행적을 �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마침 지난 2007년 10월 말 짧은 기간이었지만 북경을 처음으로 방문하여 주마간산격이지만 시내를 �어 보고 천안문 광장을 가로 질러 걸었던 경험도 되새겨 책 읽기의 즐거움이 배가 되었다.

또한 조선시대 사절단에 대한 막연하거나 잘못 알고 있었던 사실을 바로 잡을 수 있었는데, 즉 중국에 가는 사신들이 남긴 기록이 65종이나 되며 사행길도 서해를 건너는 해로, 압록강을 건너는 육로가 있었으며 청대 시절에는 사신행이 무려 700회 정도였다고 한다. 오래전 어느 기록에 사신단의 인원이 30~40명으로 나와 그런줄 알았는데 이는 정식 인원이고 약 250명에 말200필 정도였으며 전 인원이 북경에 가지 못하는 관례에 따라 많은 인원이 중간에서 조선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요즘 말로 정식으로 인정 받은 외교관은 약 30명 정도며 비공식 수행원들과 함께 북경에 갔다는 말이며 그도 저도 아닌 인원은 도중에 돌아왔다는 것이다.

사절단이 북경까지 가는 여정은 험난하여 오고 가는 길에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기도 하였다 하며 연암의 사절단이 청나라 황제의 7순 잔치를 위해 막상 북경에 도착하엿으나 황제는 여름 휴양지인 열하로 떠나 없어서 다시 고생하며 열하까지 갔다고 한다. 연암의 일기와 <신 열하일기>에도 북경에 간 사실만 적었는데 언제 시간이 되면 열하까지의 일정도 읽어 볼 계획이다.

많은 중국 연행기가 보고서 정도의 공식 기록이며 명을 존숭하고 청을 오랑캐로 보던 시각인지라 조선의 지식인들의 의식구조상 청나라에 대한 반감으로 속 깊으 정서 전달도 부족하고 애써 신기한 일도 못 본 체했으나 실용주의, 이용후생에 남다른 눈을 가졌고 호기심이 풍부한데다 더구나 비공식 자격이어서 여행에 대한 부담에서 자유스러웠던 연암은 재기발랄하고 거침없이 보고 듣고 느낀 사실들을 일기에 남겨 이를 읽는 우리들에게 기쁨을 더해 주고 있어 일독을 권하고 싶다.

책을 읽다보면 터지는 웃음을 참을 수 없는 부분이 곳곳에 나온다. 원래 여행길이란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실수와 고생이 빠지면 진정한 여행이 아니라고 누군가가 말했듯이 연암이나 이규태씨의 글에서도 실수담이 우리의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불과 이십여년 전과 지금도 시골에 살다보면 아침 인사가 '진지 드셨습니까?'이다 지금은 진지 대신 '식사하셨습니까?' 정도로 바뀌었지만...200여년 전에 실학자 이덕무는 중국에 한 번 다녀온 선배 이야기를 듣고 吹飯了碼 한마디 즉 치판라마? 만 외워 갔다고 한다.

200년이 지난 이 시절 이규태씨도 이말을 외워서 요동지방 시골 농부에게 인삿말로 썼더니 아주 이상한 표정으로 처다만 보고 있더라고 한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인삿말은 아침 저녁으로 얼굴을 맞대는 친한 사람끼리 하는 인사로 생판 처음 보는 사람이 느닺없이 쓴다면 생뚱한 말이 된다고 한다- 이 말을 해 놓고 이규태씨도 적잖이 당황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글이란 언제나 고상하고 품위가 있어야 한다는 게 상식이고 더욱 글은 더하였는데 열하일기를 읽은 연암의 집안 후학 되는 어떤 사람이 너무 심하게 연암을 공격하자 연암은 분을 삭이지 못하여 바닥에 드러 누웠다가 일어나 옆에 있던 열하일기 초고를 불태워 버리려 했다 한다. 마침 가까이 있던 이덕무, 박제가 등이 말려서 다행히 불후의 명작이 세상에 남게 된 일화가 있다고 하여 흥미 있게 읽었다.

청나라 북경에 다녀온 우리들이 잘 아는 학자로는 홍대용, 이덕무, 김정희 등이며 처음에 청나라는 심양에 도읍을 정하였고 청의 태종(혼타이지)도 인조의 병자호란을 일으켰을 때 심양에서 출병하였던 것이며 조선의 소현세자도 심양에서 볼모 살이를 하다 태종이 북경으로 도읍을 옮기자 나중에 북경으로 떠나기도 하였다. 태종의 즉위식에 조선에서 나덕헌과 이곽이 사절로 갔었는데 이군불사의 유교윤리에 입각하여 배례를 거부하자 청 태종은 '이는 조선 국왕이 우리 청나라를 원수로 삼고자 나로 하여금 사신들을 죽이도록 만드는 수작" 이라 하고 사신들을 석방하며 질책의 서한과 함께 인질 요구를 하였으며 이를 묵살하자 출병하여 조선은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고 나서야 소현세자를 인질로 보냈으며 심양에 도착한 세자는 보름 동안 무릎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청태종에게 용서를 비는 식을 거친 후 목숨을 얻었다 한다. 그 후 조선은 수달피, 꿀, 잣, 무명 등 조선산물을 바치는 조공의 예를 따를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연암의 글쓰기가 시대와 불화하였기로 이를 문체반정이라 하며 그가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하고 초야에 묻혀 사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아무튼 인물은 떠나도 그의 글은 남아 남은자에게 많은 생각을 심어 주고 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