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테의 이탈리아 기행>을 읽고...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 도서출판 푸른 숲 괴테 지음 박영구 옮김 ![]()
독일의 대문호 괴테(1749~1832, 81세)는 독일 내륙 마인강변의 프랑크푸르트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20 대에 이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발표하여 일약 문명을 날리기 시작하여 26세엔 바이마르 공국의 작센 대공 초청으로 추밀고문관직에 올라 10년 동안 공직을 맡아 일하다 1786 년 8월 23일 37세 생일을 축하하는 친지들 곁을 조용히 떠나 9 월 3 일 로마를 향해 긴 여행길을 떠났다. 당시 괴테의 부친은 이미 일찍 로마를 다녀왔었고 거실에 로마 지도를 걸어 놓았으며, 베네치아에서 사 온 모형 곤돌라를 어린 시절 괴테가 가지고 놀면서 로마여행에 대한 동경을 품고 자랐다. 사실 같은 독일인 미학자 빙켈만(1717~1768)이 1775년부터 13년간 로마에 머물며 그 연구 성과를 책으로 출판하면서 로마는 "온 세계를 위한 위대한 학교"라 하였으며 괴테도 빙켈만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리라 짐작된다. 괴테는 1788년 4월 23일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으니 1년 8개월 간의 여행을 통해 수많은 고적답사와 조각품, 미술품 감상을 포함하여 자연관찰과 화가, 음악가, 조각 가등 여러 분야의 명사들과 교제하였으며 여행 중에도 쉬지 않고 작품을 쓰기도 했다. 내가 프랑스 혁명의 연도를 1789년으로 기억하니, 괴테는 혁명 바로 전해에 여행을 마친 셈이다.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문은 독일에 남아 있는 연상의 애인이었던 샤를 로테 폰 슈타인 부인에게 "당신에게"라는 호칭으로 시작하는 편지 형식과 일기 형식 그리고 후반부는 보고서 형식 등 다양한 형태로 쓰였다.
이 여행기간에 <이피게니아>를 운문 형식으로 개작하고 희곡 <에그몬트>를 탈고하였으며 <벨라 별장의 클라우디에> <에르반과 엘미 레>도 완성하였으며 <파우스트> <타소>를 구상하는 등 조금도 쉬지 않고 작품 활동을 하였다. 희곡 에그몬트는 16세기 네덜란드의 용감한 독립운동가 에그몬트 백작이 압제자 폭군에 대항하다 죽는 비극적 내용인데 이 희곡을 베토벤이 읽고 감명받아 곡을 붙였으며 에그몬트를 상징하는 웅장한 서곡만 독립적으로 자주 연주되어 그래서 베토벤의 서곡 11개 중에서 가장 많은 사랑과 연주 회수를 보이고 있다. 두 천재인 괴테와 21세 아래였던 베토벤(1770~1827 .57)은 생전 서로 존경하였고 만나서 산책도 하곤 하였다 하는데 세상을 보는 관점은 상당히 달라서 격론을 하고 헤어지기는 일도 있었다 한다. 괴테는 다방면에 관심을 가졌는데 해부학, 식물학, 동물학, 광물, 광학, 원근법, 회화론 등에 특히 흥미를 느꼈고 직접 소묘 작품을 완성하고 빛에 대한 원리를 밝히는 등 천재로써 유감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괴테의 이탈리아 여행 경유지를 그의 기행문을 통해 추적해보면서 약 220년 전 자동차도 없고 기차도 없던 시절에 험준한 알프스 산맥을 넘어 먼 장거리 여행을 어떤 노선으로 하였는지 알아보았다. ![]()
괴테는 칼스바트를 떠나 뭰헨과 인스브르크를 거쳐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에 발을 딛기 시작하여 말체시네에 도착하여 산 중턱의 고성을 스케치하다 첩자로 몰려 성주의 심문을 받은 후 풀려나 어느 선량한 주민의 따뜻한 도움을 받는다. 이때 괴테는 <인간이란 어찌 이렇게 이상 야릇한 존재인가> 하고 스스로 자문한다. "인간은 서로 돕고 지내면 편하게 살 수 있는데도 세계와 그 세계의 내막을 자기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전유하고자 하는 무모한 욕구로 종종 불편하고 위험한 지경에 놓이는 인간이란 도대체 어떻게 된 존재인가" 하고 탄식한다. 이탈리아에 들어서서 베로나에서 3일간 머물면서 고대 로마시대에 건립된 원형극장의 위용에 감탄하고 여행의 목적을 "나 자신을 기만하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는 대상에 비추어 나를 재발견하자"라고 한다. 다음 비첸차에서도 극장에서 모차르트의 오페라 <후궁에서의 유괴>를 감상한다. 파도바를 지나 물 위의 도시 베네치아에 들려 약 보름간 체류하며 곤돌라를 타고 가수들의 노래를 듣기도 하는 등 모처럼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도시 구석구석을 부지런하게 다니면서 호기심을 충족하기도 한다. 베네치아에서 배를 이용하여 페라라에 도착한 후 다시 육로로 첸토를 거쳐 볼로냐에 도착한다. 볼로냐에서 라파엘로의 <성 세실리아>를 보고 "이 그림이 영원히 보호될 수 있다면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다"라고 중얼거리기도 한다. 볼로냐에는 피사의 사탑과 같이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탑을 보았던 듯하여 이를 괴테는 일부러 처음부터 비스듬하게 건립하지 않았을까 추측하기도 한다. 이곳에서 여러 작품을 감상하면서 "예술이란 삶과 같은 것이며 즉,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점점 더 넓어지는 것"이라고 느끼기도 한다.
드디어 괴테는 오랜 소원이었던 로마를 10월 29일 독일 출발 약 2달 만에 발을 딛게 된다. 로마를 "세계의 중심지" "세계의 도시"로 표현하면서 피렌체에 단 3시간을 보낸 일에 로마 도착 후에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한다. 로마에 발을 디딘 괴테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교황과 한 지붕 밑에 있다는 생각에 이상한 느낌을 받기도 한다. 로마에서는 독일에서 친하게 지내던 화가이자 친구인 티슈바인(1751~1829)과 재회한다. 티슈바인의 도움으로 소묘를 배워 괴테는 많은 그림을 남기고 있으며 역시 같은 독일인으로 음악가인 카이져로부터 악기 다루는 법도 배우는데 천재답게 누구보다 빠르게 그림과 음악을 익히기도 한다. 로마의 유적과 조각, 그림 등을 둘러보면서 괴테는 "아주 커다란 학교"에 온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책이나 동판화로만 읽고 보았던 실물들을 하루도 쉬지 않고 부지런히 보고 스케치한다. 숙소를 론다 니니 궁전 앞에 정하고 이미 오래전에 로마에도 명성이 알려진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장 필립 뮐러라고 거짓으로 꾸며 괴테의 실제 신분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소개하고 가명의 이름에 남작을 붙여 장 필립 남작이라고 부르는 것에 만족하였다. 이렇게 신분을 숨긴 이유는 번거로운 사교생활에 시간을 빼앗겨 자신이 원하던 조사, 공부, 작품 활동에 방해받지 않기 위해서였고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가 순수한 자유인의 시간을 향유하고 싶었던 때문이다. 괴테는 로마 체류 한 달쯤 지나 자신이 로마 땅에 밟게 된 날을 자신의 제2의 탄생일이고 진정한 삶이 다시 시작된 날이라고 토로하면서 바티칸 궁과 시스틴 예배당에 감격하고 경탄한다 특히 시스티나 예배당의 미켈라 젤로의 천장화를 보고 괴테는 "만일 한 인간이 이 작품을 보지 않으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해할 수 없다."라고 되뇐다.
해를 넘겨 2월 중순에 로마의 성대하 요란한 사육제를 구경하고 나폴리로 향하여 약 한 달 머물며 당시에 화산 분화 활동을 하고 있던 베수비오스 산에 등정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용암 불출 광경을 관찰하기도 한다. 여기서 귀족들의 초청을 받기도 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 배를 타고 시칠리섬의 팔레르모를 방문하고 여기서 육로로 당시 방문 바로 직전 지진으로 도시 전체가 파괴된 메시나를 둘러본 다음 배편으로 나폴리로 귀환하던 중 배가 해류에 밀려 암초에 부딪칠뻔한 위기의 순간도 맞으며 겨우 나폴리에 돌아와 보름 정도 머물다 다시 로마로 돌아온다. 나폴리 여행에서 다시 돌아온 로마에서 그림도 좋아하는 교양 있는 앙겔리카라는 부유한 귀족부인과 친교를 맺어 함께 그림 감상도 하고 공연에도 참석하기도 한다. 이때 밀라노 출신의 20대 초반의 약혼자가 있는 아름다운 처녀를 만나게 되어 심리적으로 갈등을 느끼기도 하는데 마침 로마에 살고 있는 다른 처녀가 괴테를 좋아가게 되어 일종의 삼각관계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괴테는 밀라노 처녀에게 마음이 더 쏠렸으나 이 처녀는 얼마 후에 파혼의 아픔을 당하여 곤경에 빠지는데 괴테는 정중하게 정신적인 위로와 도움을 주고 이 처녀가 다시 정상적이 생활로 돌아가게 하고 자기는 어느 한순간의 기분으로 이 처녀를 사랑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 시기에 이 처녀에 관련하여 자신의 심경을 나타내는 괴테의 솔직한 글이 나의 마음을 울리기도 한다. "자족하는 고요한 믿음 속에서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아무것도 원하지 않던 내 마음에 갑자기 가장 바라마지 않는 순간이 다가왔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순간 우리는 은근한 방법으로 우리를 위협하는 위험성을 간과하기 십상이다." - 맞는 이야기이다.
- 바이마르의 작센 대공 전하의 현 추밀원고문이며, 오늘날 독일에서 대단한 명성을 떨치고 있는 한 천재, 그 박식하고 고명한 괴테 씨가 우연히 테레베 강변을 찾아줌으로써 우리에게 기쁨을 주었다. 그는 이곳에서 자신의 가문과 관직, 그리고 재능을 숨겼지만, 문단에 이름이 드높인 산문 및 운문의 빛나는 업적이 어찌 드러나지 않겠는가. 이 고명한 괴테 씨가 우리의 공개 모임에 참석하는 후의를 베풀어주었다. 우리들의 숲, 이 유쾌한 모임의 일원으로서, 마치 이국의 하늘에 빛나는 샛별처럼 나타나니, 이곳에 참석한 대다수의 아르카디아 회원은 뛰어난 작품을 무수히 집필한 그를 만나는 기쁨에 환호와 갈채를 보낸다. 아울러 만장일치로 메갈리오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목자 모임의 일원이 되도록, 비극의 아름다운 신에게 바쳤던 멜로포니아 땅을 그가 받도록 지정하고, 정식으로 그를 아르카디아 회원으로 받아들이는 바이다. 모든 회원은 열렬한 박수를 보냄과 동시에, 이 장중한 공개 입회식을 아르카디아 연감에 기록한다. 또한 이 유명한 신입회원 메갈리오 멜포메니오에게, 우리의 문학적 목자 공화국이 그 뛰어난 재능에 대해 오래전부터 품어온 최고의 경의를 표시하고자 여기 입회 허가서를 증정하도록 회장에게 의뢰하는 바이다.
전 회원의 결정에 따라 간사 니빌도 아마린치오 부간사 코림보, 멜리크로니오, 플로리몬테, 에지레오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문을 읽어보니 그가 독일에서 출발하여 이탈리아를 마차로 여행하였던 노선이 마침 내가 1994년 버스를 이용한 유럽여행 노선과 겹치는 도시가 많다. 나는 암스테르담에 도착하여 벨기에 부륏쉘 독일 하이델베르크, 푸랑크쿠르트를 거쳐 인스브루크 알프스의 샤모니를 구경하고 알프스를 넘어 베네치아 , 플로렌스, 로마, 나폴리 였으며 돌아 오는 길도 괴테의 길과 비슷하였다. 바로 이 길은 218년 전 괴테 시절에도 중부 유럽에서 이탈리아를 가는 가장 빠른 길이었었던 같다. 이미 보장된 안전한 자신의 자리를 미련 없이 버리고 고생스러운 여행길을 지적, 예술적 채움을 위해 훌훌히 떠나 경우에 따라서 목숨까지도 내건 천재이고 백과사전적인 괴테의 용기와 도전정신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인간은 호기심의 동물이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면서 위대한 천재 위대한 지성인 괴테에게 새삼 존경을 표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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