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후기

" 나의 아버지 박지원" 을 읽고...

깃또리 2004. 5. 26.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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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버지 박지원"을 읽고...

(1737, 영조 13,~1805, 순조 5)

참우리 고전 1.

돌베개

박종채 지음, 박희병 옮김.

2004.3.

 

 

 고미숙의 "열하일기,~ "를 읽고 대강 알고 있던 연암 박지원에 대한 깊은 인상을 받았는데 책 말미에 연암의 둘째 아들 박종채가 쓴 아버지 박지원에 대해 한문으로 된 글을 한글로 옮긴"나의 아버지 박지원"을 읽기를 추천하여 이 책을 손에 들게 되었다.

옮긴이 박희병은 서울대 인문대학 국문한 교수로 각 페이지마다 아래에 나오는 각주를 읽다 보면  뛰어난 학자임을 알 수 있었다. 하기야 필생을 한문학과 국문학에 열정을 바쳤으니 당연한 일이긴 하다.


 책머리에 연암선생은 영국의 셰익스피어, 독일의 괴테, 중국의 소동파와 같은 반열의 우리나라 최고의 문호로 내세웠는데 내가 보기에 조금은 과대평가인듯하긴 해도 크게 벗어나지는 않은 것 같다. 국문학이나 세계문학에 어두운 내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앞의 세 문호는 그들의 노작이 대부분 완성과 정리가 체계적으로 잘 되어 이들의 작품이 뛰어남이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으나 연암의 경우에는 말년에 이런저런 사정으로 마음먹고 쓰려던 작품이 구상 단계에서 실현을 이루지 못하고 아쉽게도 지병에 의하여 붓을 더 이상 잡지 못하였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의 작품이 결실을 맺지 못한 형편이다. 또한 기왕에 작성된 작품들도 상당수 망실되어 그 목록만 전해지고 있으므로 애석함을 금할 수 없는 실정이다. 그 어찌 되었든 연암 선생이 생전에도 문명을 날리기도 했지만 사후에도 그 평가가 날로 새롭게 조명되고 높이 현창 됨을 볼 때 조선시대 최고의 문장가이고 나아가 단군이래 최고의 문호라고 부르는데 이의를 달 수 없겠다.

 
원래 아들 박종채는 책 제목을 과정록 過庭錄 이라 하였는데 이는 자식이 부친의 언행과 가르침을 기록한 글이라는 의미이며 무려 4년간 초고를 쓰고 다시 몇 년간 수정과 보완작업을 하여 이 과정록을 심혈을 기울여 완성하여 후세에 남겼다 한다. 내용을 읽어보면 연암의 성격, 언행, 교우관계, 벼슬살이 과정, 용모, 관련 일화등 다양하게 기술하였으며 글에 나타난 인물도 수십 명에 달하고 있다. 근 이십여 년 전에 연암 선생과 동시대인인 다산 정약용 선생의 산문집(한글판)을 읽고 조선 사회사를 처음으로 생생하게 접하고 그 흥미진진함에 오랜 여운을 느끼고 있었으며 그동안 이런저런 조선시대 사회상을 담은 책을 구해 보았지만 이렇게 글쓴이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한 생생한 내용과 표현으로 책을 쉽게 놓을 수 없도록 만들어진 책은 드물어 과연 조선시대 전기문학의 금자탑이란 표현이 지나치지 않을 정도였다. 조금 흠이라면 아들이 아버지에 대한 전기형식으로 쓴 글이다 보니 아무래도 아버지의 결점을 조금도 나타낼 수 없어서 마치 연암은 인간의 약점이 조금도 없는 정말무결한 사람으로 묘사되기도 하였다.

 아무렴 특히 조선시대에서 아버지의 흠이 있다손 치더라도 어떻게 자식이 이를 드러내게 될 수 있겠는가! 

 

 내가 이 책을 읽고 의아하게 생각한 점은 연암선생은 마음만 먹으면 과거에 어느 때라도 응시하여 합격을 할 수 있는 자격과 실력을 구비하였고 주변에서도 임금님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이 과거 응시를 희망하였고 응시하면 당연히 장원까지도 바라 볼 상황이었는다. 특히 정조 임금 같은 분은 어떻게 해서라도 박지원을 과거에 합격시켜 요즘 말로 하면 재야에서 제도권으로 편입시켜 휘하에 두고 싶어 했는데 이를 초연히 물리치고 나이 50이 되어서야 음직으로 벼슬길에 나아가 지금으로 치면 큰 면의 면장(현감)과 읍장( )그리고 마지막으로 박지원이 가장 높은 지위에 오른 게 군수(양양부사) 자리를 맡은 게 전부이다. 조선시대에 과거를 거치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재주가 많고 학식이 풍부해도 벼슬을 할 수 없고 음직이라 하여 가문의 공으로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인데 이는 어느 한계가 있었다 한다. 양양부사도 음직으로는 특별대우의 자리였다고 한다. 박지원이 벼슬길에 나아간 것은 살림이 궁핍하여 응했다 하는데 그때라도 마음만 먹으면 과거를 응시하면 되었고 가끔 나이 50 넘어서도 과거에 응시하여 합격한 사람이 있었는데 박지원은 끝까지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음직으로 벼슬살이를 한 사실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물론 연암선생은 애초 젊은 유학자 시절부터 과거를 백안시하고 벼슬을 하지 않으려 했지만 결국 자기 동문수학하던 친구나 후학들이 요즘으로 치면 부총리, 장차관인 삼정승을 비롯하여 판서, 참판이 즐비한데 그의 심정은 헤아릴 길 없다. 그러나 그의 문장 실력은 워낙 출중하여 궁벽한 시골 현감을 하고 있어도 위로부터 임금님부터 모두 그를 주시하고 중요한 글을 그에게 짓도록 하기도 했다니 당시에도 그의 학식이나 문장력은 이미 인정된 셈이다. 연암선생이 누구보다 뛰어난 점은 당시 내로라하는 문장가들이 중국 명조나 그 이전의 고문을 천편일률적으로 인용하고 우려먹는데 반하여 연암은 여러 가지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새로운 글쓰기를 하였다 한다. 이른 소위 문체반정이라 하는데 당시 조선시대의 문예부흥을 주도했다는 영조와 다음의 정조 임금은 이를 조금 이해하지 못하고 못마땅하게 여겨 연암 선생의 마음을 돌려 보려고 몇 번 회유도 하고 겁을 주기도 하였으나 가장 중요한 벼슬을 헌신짝처럼 여기고 자기의 천품과 이상을 위해 영원한 자유인으로 자기 갈 길을 갔던 Out Sider 였던 사람이다.

 형편이 이런 정도였으나 그래도 워낙 그의 글이 재미있고 파격적이면서도 기품이 있고 새로우면서도 근본을 따르고 날카로우면서도 정감이 흐르며 깊은 통찰력으로 미래를 내다보는 문장을 썼기 때문에 한번 그의 글을 마주하면 그 매력에 빠져 나오지 못하였다 한다.

 
오즉하면, 훗날 순조 임금님이 암행어사 서능보에게 보고서 형식을 기왕이면 박 연암식으로 해보라고 지시하였다니 그의 문체의 인기를 알만하다. 대표적인 연암의 글이 바로 "열하 일기"인데 당시로써는 너무나 파격적이어서 요즘으로 치면 금서로 묶으려 했으나 삽시간에 널리 퍼져버리고 많은 사람이 읽어 버린 바람에 어쩌지 못하고 연암에게 다시는 그런 형식의 글을 쓰지 말도록 하였다 한다. 연암은 나이 18세에 이미 "광문자전"이란 소설을 비롯하여 "민옹전" 등 수십편의 소설을 썼으며  열하일기에는 우리가 교과서에 실려 잘 알고 있는 "호질" "허생전" 등이 들어 있고 평생 일반 백성을 삶을 개선시킬 수 있는 여려 경세적인 책과 천문, 지리, 병학 등 실용서를 저술하였다.

 당시 조선 지식인들은 멸망한 명나라를 아직도 잊지 못하고 당시의 중국 청나라는 오랑캐라 하여 면종복배하는 형편이었으나 앞을 내다 보고 백성을 생각하였던 박지원은 실사구시, 이용후생의 기본적인 사상 위에 명나라의 뛰어난 문화적 유산은 물려 받아야 하지만 번성하는 청나라의 신문물은 받아들여 제도, 관습, 기술 등을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지극히 실리적인 생각을 한 인물이었다.  연암의 성격은 너무나 강직하고 금전에 청렴한 사실은 대대로 내려온 가문의 전통이었으며 불의에 굽힘이 없다보니 모함을 받는 일이 자주 있었다 한다. 즉 그는 조금은 융통성이 없는 원칙주의자에 해당하였고 너무나 뛰어나다 보니 시기와 질투를 받은 셈이다.


 조선시대 왕가에서는 골육상쟁으로 피바람이 그치지 않았고 벼슬길에 올랐던 많은 인물들이 당파싸움으로 죽이고 죽임을 당하는 그런 시대였는데 어쩌면 박지원 같은 인물이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묻힘으로써 이런 싸움에 끼이지 않고 제 명을 유지하지 않았을까 하는 다행스러운 생각도 들기도 하고 선견지명이 있는 박지원은 이를 꿰뚫어 보고 자기 스스로의 길을 걸어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미치기도 한다. 이런 유유자적한 삶에서도 삼종형을 따라 직함도 없이 요즘 말로 하면 비공식 수행원 자격으로 청나라 수도 북경에 따라가 열하까지 가게 되어 국문학에 빛나는 발자취를 남긴 열하일기를 썼는데 단순히 청나라 연호를 일기에 기입하였다 하여 모함을 받기도 하였으며 연암이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묻혔던 사실은 우리 국문학으로 보면 퍽 다행스런 일이다. 당시 세도가 나는 새도 떨어뜨릴만 하다는 젊은 홍국영의 눈에 잘못 보여 죽을 고비를 주변 친구들이 모면하게 하여  목숨을 부지한 사실은 정말 한 편의 소설을 보는듯하였다. 다산 선생이 별 죄목도 아닌데도 강진에서 18년이란 장기간 유배생활을 하였고 이 기간이 그의 방대한 저술에 막대한 기여를 한 점으로 미루어 역사는 전화위복의 되풀이가 세상을 조금씩 바꾸기도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옛날의 천재들은 동서양을 불문하고 다재다능하였는데 연암선생연암 선생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그림도 뛰어나 어느 모임에서 죽은 아무개가 보고 싶다는 말이 나오자 그 자리에서 종이와 붓으로 그 사람을 똑 같이 그려 모여 앉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한다. 당시 양반은 그림을 감상하고 논평은 하였지만 그리지는 않았으므로 만일 연암 선생이 그림을 그렸더라면 상당한 실력을 나타냈을 것으로 생각한다. 중국 여행 시 선물 받은 중국 악기도 몇 번 들어 보고 바로 그 자리에서 연주를 하였다고 하며 관찰력도 뛰어나 중국에서 보고 온 새로운 기구와 건축기술을 귀국 후 그대로 본떠 만들고 시행하기도 했으며 풀, 꽃, 곤충들이 모습이나 움직임도 수시간 관찰한 다음 그들의 생태를 알아보기도 하였다 한다. 밝은 달이 뜬 날은 하염 없이 달빛 아래 거닐기도 하고 눈 내리는 날은 방문을 열고 오래오래 깊은 생각에 잠기기도 한 로맨티스 트였다고도 한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그 시대 문인으로써 다른 사람과 달리 시를 많이 짓지를 않아 겨우 50수를 남기고 있는데 이는 당시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며 이와 관련하여 북학파였으며 "북학의"의 저자 박제가는 이런 말을 했다 한다.

 

 "예로부터 훌륭한 글은 얻어보기 어려운법,

연암의 시를 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우담바라 꽃 피고 포청천이 웃을 때

그때가 바로 선생께서 시를 쓸 때, "

 

 라 하여 선생의 과작에 대한 의견을 표현하고 찬탄하고 있다.

역시 당대 대단한 문장가 이덕무도 "황하가 100년에 한 번 맑아지는 일"에 비견하며 연암의 글을 추켜세우기도 하였다.

 나와 같이 글쓰기와는 한참 떨어져 있고 더구나 국문학과는 거리가 멀어 감히 논할 입장이 못 되는 사람도 귀담아 들어 볼 연암의 글쓰기에 대한 원칙의 일단을 여기서 엿볼 수 있다.

 

글쓰기의 4가지 어려움 바꿔 말해 글을 잘 쓰려면,

 

1. 학문을 갖추고,

2. 공정하고 밝은 안목을 갖추고,

3. 자료를 총괄하는 역량을 갖추고,

4. 분명하고 명쾌한 판단력을 갖추어야 한다.

 

 말을 바꾸어 표현하면 재주, 학문, 식견. 이 셋을 갖추어야 좋은 글이 나온다는 평범하고 진리에 가까운 얘기가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다는 말이다. 연암을 글쓰기는 지금으로 보면 철저한 사실주의, 독창성과 자주성, 풍자와 해학 골계를 아우르는 당시로는 사대부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문체였기 때문에 결국 시대를 앞서간 천재가 겪는 아픔을 고스란히 안고 간 셈이다. 중년에 연암은 중국과 우리나라 책에 공통적으로 다 같이 실려 있는 관련 사실을 하나로 묶어 총서 叢書로 꾸미려는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목록부터 작성하였다 한다. 이름하여 삼한 총서 三 韓叢書인데 약 175권이나 되는 방대한 규모이며 일부는 망실되어 목록만 남았으나 하여튼 이런저런 사정으로 목록만 정리하여 놓고 손도 대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였다. 인명 해설 난에는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생몰년대와 벼슬 등 간단한 소개가 나와 있는데 약 150명으로 여기에 다산 정약용 선생의 이름을 비롯하여 다산의 형 동생인 정약종, 정약현 등이 모두 빠져 있어  의문을 더해주고 있다.

 

 후기에서 박종채는 연암 문고 16권, 열하일기 24권, 과농소초 15권 이 아직 간행되지 못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조선시대 관련 책을 보다 보면 많은 벼슬이름이 나오는데 나는 정식으로 공부를 하지 않아 단편적인 상식만 가지고 있어 이번 기회에 자세히 벼슬 관련을 알아보았다.

 하긴 조선 500년이란 긴 세월에 벼슬 호칭이나 제도가 바뀌어서 일정하지는 않지만 일단 조사된 대로 적어 본다.

 

공경대부: 3공 9공

3공-영의정, 좌우정, 우의정                                                  - 정 1 품

9공-6조 판서, 좌우 참찬 2명, 한성판윤(서울시장) 1명.                - 정 2 품

대부 : 아마 몇 품 이상의 관직에 올라 있는 직위를 말하는 것 같다.

 

외직: 지방관리

내직: 한양에서 근무하는 관리. 단, 개성유수, 광주유수, 강화유수, 수원유수 등은 지방이지만 내직으로 간주하였던 같다.

 

내직

 

의정부 :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 정 1 품.

6조 판서    :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                     - 정 2 품

6조 참판    :                                                                  - 종 2 품

3사            : 언관직으로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을 말함.

 

승정원 : 도승                                                                  - 정 3 품

의금부 : 판사 -법 집                                                        - 종 1 품

사헌부 : 대사간 -감찰(감사원)                                             - 종 2 품

사간원 : 대사간 -간쟁                                                        - 정 3 품

홍문관 : 대제학 - 고문역 :홍문관은 옥당이라고 함                   - 정 2 품

춘추관 : 지사    - 역사 관리                                               - 정 2 품

한성부 : 판윤    - 한양 수령(서울시장)                                  - 정 2 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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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청 : 포도대장

 

숭문원 : 교린 업무

승정원 : 왕명 출납

 

 

 

 

판서, 참판(차관), 참의, 참지, 좌랑...

판윤, 부윤(부시장)

 

 

외직

 

관찰사=감사  : 8도 후에 13도 수령    - 8 도 수령   -종 2 품

부윤            : 전주, 경주, 개성, 함흥, 평양, 의주 등 - 주요 거점지역 수령령                  - 정 3 품

유수         : 강화, 개성, 광주, 수원, 춘천 등    - 한양 주변 주요 지역 수령            - 종 2 품

목사         : 진주, 광주, 충주 등                     - 관찰사 아래 각 목 수령             - 정 3 품

부사         : 동래, 양양, 강릉, 북청 등             - 약간 큰 지역 도호부 수령         - 종 3 품           

군수         : 청도, 면천, 김포, 옥천, 영천, 금천 등- 약간 작은 지역 수령                 - 종 4 품

현령         : 경산                                           - 큰 현 수령                               - 종 5 품

현감         : 안의, 경산, 음성, 울진,

                  포천, 언양, 진천, 언양, 태인 등    - 작은 현 수령                            - 종 6 품

봉사         :                                                                                                   - 종 8 품

참봉         : 최하위 벼슬 능 관리, 원 종친부, 동령부, 봉상시, 내의원 관아 근무         - 종 9 품

 

양반 :

 

동반  : 문반으로 정 1품에서 정 9품

서반  : 무반으로 종 1품에서 종 9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