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후기

<텅 빈 충만>을 읽고...

깃또리 2018. 6. 8. 09:37

<텅 빈 충만>을 읽고...
법정
샘터
2017. 12. 30.


 모순어법(矛盾語法, Oxymoron)은 효과적인 표현을 위해 이치에 어긋나거나 앞뒤가 맞지 않는 어휘를 조합하여 뜻을 강하게 전달하는 어법이다. 예를 들면, ‘소리 없는 아우성’, ‘침묵의 소리’, ‘똑똑한 바보’ 같은 표현들이며 <텅 빈 충만>도 역시 모순어법이며 문학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법정스님의 화두 중 하나인 ‘무소유’는 물질적인 욕심에서 벗어나면 정신적으로 자유롭고 풍요로워진다는 뜻이며 마음속의 욕심까지도 비우면 삶이 즐거움과 편안함으로 가득해진다는 의미이다.


 대부분 1986년에서 1989년에 걸쳐 쓴 글모음이다. 1986년은 ‘아시인 게임’ 1988년은 ‘하계 올림픽’이 열렸던 해로 비약적인 경제 성장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위상을 스포츠를 통하여 전 세계에 과시하던 시기이다. 나를 포함하여 보통 사람들은 앞뒤 생각 없이 흐뭇하고 들뜬 기분을 감출 수 없었던 때였으나 법정스님은 눈과 귀를 온통 스포츠 행사에 모으게 하는 일에 걱정과 우려가 담긴 글을 여러 편 쓰셨다.   지금 뒤돌아보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어떤 나라든 한 번은 겪고 지나치는 성장 통 비슷한 것이라 생각한다. 왜냐면 선진국인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과 같은 나라도 스포츠 행사를 국가차원에서 지원하고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인간과 자연>이라는 소제목의 글에서 “자연과 인간은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로 회복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서양사람 사고의 바탕을 이루는 기독교 <창세기>에 ‘하느님은 자신이 만든 남녀에게 복을 내리면서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위를 걸어 다니는 모든 짐승을 부려라!“라는 구절을 인용하셨다. 이는 곧 인간은 자연 위에 군림하고 모든 살아 있는 존재 중에서 가장 우월함을 뜻하고 그래서 높은 산봉우리를 오르고 나서 ‘산을 정복했다.’라 하는데 이는 가당치 않은 말이라 하였다. 산봉우리에 잠시 머무르다 온 것이 어찌 정복이며 관연 인간은 산을 정복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그래서 ‘자연은 우리로부터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고, 훈련으로 정복되어야 하는 대상도 아니다. 자연은 우리들의 한 부분이며 만물과 이어진 아름다움과 장엄이다. 산에서 우리는 깨달음을 얻고 삶의 의미를 배운다.’라고 금세기 전반기를 살다간 영국의 등산가이자 저술가인 F.S. 스마이드는 <산의 정기>라는 책에 이렇게 썼다 한다. 북미와 남미에 사는 인디언들은 혈통적으로 동양인의 피를 받아서 인지 자연관은 동양 사람과 다름없어 양식 있는 서양인들은 이들의 자연관을 존경하고 부러워한다고 한다. 인디언들의 생각을 소개하는 글에서 1855년 당시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피어스가 스와미 족 추장에게 살고 있는 땅을 미국정부에 팔도록 강요하자 추장은 긴 편지를 대통령에게 보냈다하며 2페이지에 걸쳐 소개하고 있다.  이 편지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당신은 어떻게 하늘을, 땅의 체온을 사고 팔수 있습니까?” 그러나 결국 이 땅은 미국의 한 주가 되었고 그 추장의 이름 ‘시아틀’만이 도시 이름 ‘시애틀’로 흔적을 남기고 있다 하였다.


<잘못된 소견> 석가모니께서 기원정사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는 세 가지 그릇된 소견을 요약해 본다.
 첫째, 이 세상의 모든 일을 ‘전생의 업’이라 하지만 이 말에 얽매이지 말라. 나는 ‘전생의 업’이 불교의 중요한 교리로 알고 있었는데 석가모니께서 오히려 ‘전생의 업’에 연연하지 말라하셨다 하니 의외이다.
 
 둘째, 모든 것은 오로지 ‘신의 뜻’에 달린 것이다. 그러나 법정스님은 별도로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신은 절대적인 세계를 갈구한 나머지 우리 인간이 세워놓은 개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또한 “진실한 종교는 지역적인 한계가 없다. 신은 ‘사랑’이고 ‘진리’이고 ‘우주질서’다. 그렇기 때문에 마하트마 간디의 표현처럼, 종교는 이것만을 좋아하고 저것만을 피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 속에서 그 신성을 실현하는 데 있어야 한다.”
 
 셋째, 어떤 사람들은 ‘인 因도 없고 연, 緣도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이 세상은 보이지 않는 인과 연으로 짜여져 있으므로 스스로 이 세상에 태어나 살다가 죽는 존재가 아니라는 말이다. 세상은 갈수록 개인주의, 파편화로 치닫고 있어 사람과 사람사이의 벽이 두꺼워지고 있다. 우리 모두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가로막힌 벽을 허무는 일이 좋은 세상을 만드는 일이라 생각하는데 현재의 상태로 보면 단지 희망일 뿐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답답하다.


 <집착에서 벗어나려면>
 “열반이란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온갖 번뇌와 갈등이 사라져 평온하고 청정하게 깨달음의 경지를 가르키는 말이다. 니르바나, Nirvana란 번뇌의 불꽃이 꺼져버린 상태, 그래서 적멸이라고 번역하기도 하며 그 열반이 이르려면 다음 네 가지 즉, 몸(身), 느낌(愛), 마음(心) 그리고 현상(法)에 대하여 똑바로 관찰하고 끊임없이 정진하여 바른 생각과 지혜로써 세상의 허욕과 번뇌를 끊어버려야 한다.”라 하였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언젠가 죽음을 맞으며 결국 죽음으로써 모든 번뇌와 갈등이 사라져 열반하는 셈이지만 수행자는 죽음 이전에도 열반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말이다. 조금 더 생각해보면 열반의 경지도 수준의 차이가 있지 않을까 한다. 즉, 완전한 열반과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른 열반으로 평범한 사람도 옳은 생각과 행동을 실천하며 산다면 열반의 경지에 조금씩 조금씩 다가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특정 종교와 관계없이 죽음을 앞두고 평온한 마음과 선한 생각을 지니고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숨을 거두기 때문에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열반의 경지에 들어 세상을 떠난다할 수 있다. 결국 열반이란 아주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복의 힘>
 부처님의 사촌동생뻘 되는 제자 ‘아니롯다’는 석가모니의 설법을 듣다 조는 바람에 꾸중을 들었다 한다. 잘못을 뉘우친 다음 밤과 낮으로 자지 않고 일하다 결국 실명했다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을 도와 준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도와 준 사람이 석가모니여서 아니롯다는 또 무슨 복을 지을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한다.  그러자 석가모니는 여섯 가지 만족을 모르는 법이 있고 그 중에서도 ‘중생을 건지려’는 끝없는 염원이 있다했다 한다. 예수가 세상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었다 하고 부처님도 중생을 구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는 말이다. 결국 성인의 발자취는 같다 할 수 있다.


<모년 모월 모일>
 라마크리슈나(1836~1886)의 어록을 읽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인도의 성인 라마크리슈나는 서 뱅골 주에서 브라만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신비체험을 하고 수행자 ‘토타푸리’의 설교에 감화를 받고 수행자가 되었다 한다. 그는 인간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신의 존재를 깨닫는 것이고 그 수단으로는 ‘사랑’과 ‘헌신’이라 하고 힌두교를 시작으로 기독교와 이슬람교를 섭렵한 다음 모든 종교는 다 같이 진실성이 있다고 설파했다 한다. 주변 상류사회 남녀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신의 화신으로 추앙하였고 1886년 콜카타에서 후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한다. 인도에서는 불타, 상카라아 함께 3대 성자로 알려지고 있다.


 법정스님은 라마크리슈나의 가르침을 간단히 소개하였다. “이 우주의 근원이며 창조주인 신(Brahman)은 유형무형 어느 쪽으로 다 존재한다. 그 시대와 민족의 다름에 알맞은 형식의 가르침을 통해서 신은 자신을 여러 가지로 나타낸다. 모든 종교의 모든 신은 이 신의 출현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종교와 그 가르침은 하나의 진리(신)의 다채로운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자기가 믿는 종교를 통해서 신과 하나가 된다. 이 때 자기가 믿는 종교만이 옳고 다른 종교는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 방법과 길은 수단에 불과하다. 이것을 목적이나 도달점인 신, 그 자체로 혼동해서는 안 된다. 신과 합일하는 네 가지 수단은 다음이다.


첫째. 지식과 지혜를 통해서,
둘째, 믿음과 헌신을 통해서,
셋째, 이웃, 사회에 대한 봉사활동과 자신에게 주어진 업무수행을 통해서,
넷째, 마음의 집중과 자기 절제를 통해서,”


 평소 내가 생각하는 종교, 신에 대한 문제를 합리적이고 명확하게 말하고 있어 마음이 가볍고 기쁘다. 이렇게 간단하고 분명한 사실을 도외시하고 자신이 믿는 종교와 신을 위해 무차별하고 잔혹하게 싸우고 죽이고 있으니 통탄할 일이다. 특히 정치인들과 죽음의 무기제조자나 무기 상인들은 종교분쟁을 간교하게 이용하여 세계 곳곳에서 총성이 울리게 하고 무고한 양민이 떼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다. 만약 어떤 유일신이 있다면 바로 이 자들부터 처단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버젓이 활보하는 것을 보면 정녕 유일신이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하는 셈이다. 바꾸어 말하면 이 세상의 모든 종교인은 이 사악한 인간들을 본의 아니게 도와주는 역할을 하고 있으니 인간 본성의 이성에 눈을 떠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늘 아침 신문에 우연히 이와 관련한 글이 실렸다. 독일의 어느 작음 마을 성당 입구에 여러 언어로 된 글이 있는데, 독일어로 “우리가 천국이 어떤 곳인지에 대해 싸우는 동안 우리 지구가 망가지고 있다.”로, 망가지는 정도가 아니라 이 지구상의 핵무기가 어떤 실수로 사용된다면 지구 파멸에 이를 것이다. ‘천국이 어떤 곳’이냐 정도가 아니라 ‘이스라엘 수도가 어디로 해야 하느냐’라는 사소한 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분란을 일으키는 트럼프, 이 무분별한 사람의 말에 겁을 먹고 대사관을 옮기겠다는 힘없는 나라 대통령 등 이성의 마비를 이 보다 실감 있고 슬프게 보여주는 일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