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아버지의 도시"를 읽고...
정영주 시집
실천문학사
2004. 9.
좋아하는 후배로부터 시집 한권을 받았다.
시인은 후배의 아내와 친교가 있는 분이란다.
시인은 서울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를 따라 강원도 묵호에서 유년시절을 보내고 춘천여고를 졸업 후 결혼하여 전라남도 광주에 살면서 이제는 지천명의 나이에 이른 세상의 순리를 아는 생활인이다. 시인, 소설가, 화가, 음악가 등 모든 예술가들의 작품은 결국 그들의 살아온 궤적과 주변환경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시인의 작품은 묵호, 춘천, 태백, 그리고 광주 근처를 배경으로 씌어졌다.
1999년 대한매일 신춘문예에 <어달리 새벽>이 당선되어 등단하였으며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한 후 단국대학에서 박사과정을 거치고 있다한다.
시집을 열면 먼저 유년시절을 보낸 묵호의 바다가 펼쳐진다. 같은 바다지만 갯벌이 끝간데 없이 펼쳐지는 갯내음이 물씬 풍기는 서해안, 점점이 떠 있는 아기자기한 섬들과 호수 같은 남해안과 달리 동해바다는 거칠것 없이 한눈에 오직 푸른 물빛만 망막에 들어오는 조금은 무서움이 밀려오는 거친 바다이다.
시집 1부의 <어달리 새벽>은 "묵호는 검은 고래다."로 시작하는데 갓 잡아온 비릿한 생선 냄새가 물씬 풍기는 새벽 선창가의 질펀한 풍경이 나타난다.
<어달리 아이들>에서는 햇볕에 까맣게 그을린 선창가 근방에 사는 아이들이 경매장에서 어른들 눈을 피해 생선을 나꿔채 달아나는 모습이 나오는데 오래전에 군산에서 일할 때 들었던 어느 일꾼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지금은 아구란 생선이 단백질이 풍부하여 일본으로 수출하는 비싼 생선이지만 옛날에는 생선으로도 쳐주지 않던 바다고기로 이른 아침 어머니 성화에 선창가에 가면 밤 고기잡이 나갔다 들어온 배에서 어부들이 생선을 퍼 올리는데 대개 아구는 버리려고 한곳에 추려놓았다 한다. 가장 큰 놈을 골라 철사로 입주둥이 한쪽을 걸어 들면 자연히 큰 입이 벌어진다 한다. 어부들이 정신 없는 틈을 타 조기나 어머니가 좋아하는 생선을 얼른 아구 입에 쳐넣고 집으로 돌아 와서 아구 입에 들어 있던 생선만 커내고 아구는 대개 버렸던 생선이라 한다.
그 얘기를 퍽 재미 있게 들었는데 지금도 아구찜만 보면 그 당시 들었던 생각이 나곤한다.
화끈거리는 얼굴을 비비여 아이들은
탱탱 불은 고추를 휘어잡고 바다로 내달린다.
그곳에서 닿기도 전에 아이들은 실오줌을 싸대고
파도는 하얀 거품을 튀기며 아이들의
아랫도리를 훔쳐댄다.
<어달리 아이들>에서... 제 3연
<아버지의 도시 1,2,3,4,5. 묵호, 그리고 겨울동화, 바다와 흥정1,2.> 등에서 묵호와 묵호에서 가까운 탄광에서 가족을 위해 돈벌이를 하는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의 얼굴만 보고 생활하는 가족들의 모습이 등장한다.
2부에서도 탄광의 을씨년스러운 풍경이 나타나는데 <폐광촌,폐장1,2. 마지막 광부-벌어곡역에서>등에서 빈집, 진폐증,쪽방 같이 스산한 어휘들이 자주 보이고 이제는 과거와는 달리 새롭게 개발되어 모습을 달리 하고 있는 태백, 사북과 같은 지명이 보인다.
가끔은 해찰한 별들이 들어가
기차를 기다리는 객이 되기도 하는 적막한 역처럼
광부의 아내, 토방 앞 둥그적이 앉아
유성 바라보듯 막막히 사내를 기다리리라
기다리는 일만이 산 속에선 유일한 출구인
<마지막 광부>에서... 4째연
3부는 시인이 여고를 다닌 춘천의 풍경들이 줄지어 나타난다 <안개의 강><안개도시1,2.> <눈과 날>등에서 안개에 잠겨드는 도시와 흐릿한 도시의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모습을 노없이 흐르는 배처럼이란 시인다운 아름다운 표현으로 그려져 있다.
자욱히 안개비가 내리면 도시는 출렁거리고
사람들은 배가 되어 노 없이 흐른다
<안개 도시 1>에서... 3째연
제4부는 <겨을 배롱나무>부터 시작한다. 배롱나무는 그 나무 이름이 정겨워 나무를 보기도 전에 내가 좋아했던 나무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연분홍 꽃이 오래 지지 않는다 하여 목백일홍(木百日紅)이란 이름도 가지고 있으며 박정희 대통령 기념 식수로는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이라 부르는 주목을 그리고 꽃나무로는 배롱나무를 좋아해서 여기저기 심게 되었다고 하며 그래서 아산 현충사에 가면 곳곳에 이 나무가 있다.
배롱나무는 원래 아랫지방 나무여서 서울지역에 적었는데 요즘엔 이곳저곳에 식재되어 보기가 어렵지 않다.
배롱나무가 시에 나온다는 것은 이제 시인의 삶의 터전이 남쪽이라는 말이며 <지실풍경>은 전남 담양의 송강 정철 선생이 유배지로 머물렀던 마을이며 <난산에 에 가서>도 역시 광주시 어느마을이다.또 광주에서 가까운 섬진강 순천만근처의 작은포구라는 여자포 그리고 목포의 북항의 옛이름이라는 뒷개 등의지명이 시 제목에 들어있다.
아마 시인이 어느해 강원도를 떠나 오월에 결혼식으 올린듯하다. 왜냐면 1부 마지막에 <오월의 신부>가 나오기 때문이며 그 전문을 여기 옮겨본다.
그해 여름
석탄과 바다와 파도뿐인
묵호에서 광주까지 시집온 그녀에게
제일 먼저 달려든 것은 붉은 꽃들이었다
무등산을 타고 오르는 보랏빛 오둥나무 꽃과
자지러진 아카시아 꽃의 짙은 내음
검은 복면의 사내인 묵호
그 마지막 석탄 가루를 털어내고 달려온
남녘 무등의 향기에 감전된
오월의 신부에게
신랑은 준비된 신혼의 꿈을 기어이 내놓지 못했다
온통 무등의 진흙으로 반죽된 고통과 좌절과
찢어진 희망의 뒷모습뿐
오월의 신랑의 뒷모습뿐
오월의 신랑이 줄 수 있는 건
푸른 불기둥으로 다시 솟아야 한다는
사랑과 맹세와 평화의 신혼
묵호의 대책 없는 바람이 이곳에서 다시 불었다
검은 바다의 그 탱탱한 불은 성난 파도가
금남로에 넘실거렸다
시외버스가 막히고 열차도 끊기고
전화도 TV도 부서져버린 광주는
어린 시절 묵호의 깜깜한 원시림
그 갱도를 맨손톱으로 파는 피 터지는 싸움이었다
그 속에 지금도 갇혀 사는 아버지의 천번의 죽음과도 같은
오월의 신부가 그때 할 수 있는 일은
문 밖의 남편을 사랑하는 일
바라보고 보듬고 끝없이 끄덕이는 일
가마니로 문짝을 대신한 드센 바람을 안고라도 살아냈던
묵호의 겨울처럼 찬 등으로 서로 부싯돌이 되는 일
그리하여 오월의 신부는 아이를 잉태했다
아랫배에서 온통 지저귀는 종달새 소리와
수선화 서늘히 피어오르는 아름다운 음악을 들었ㅎ다
십자가 그 승리의 잉태를.
그러나 이 거친 바다에 목매어 고달픈 삶을 내 맡긴 고단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겐 이 바다가 숙명으로 다가오며 정영주의 시 1부에 이들의 모습이 곳곳에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