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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4 C.IULIUS CAESAR 율리우스 카이사르 上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서 4.5 권이 모두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대한 이야기이다. 로마제국 1000년 동안 하늘의 별처럼 명멸하는 수 많은 장군과 황제가 출현하였지만 아마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앞지를 만할 걸출한 인물은 없을 것이다.
4 권은 이 불세출의 영웅의 출생부터 시작하여 주로 갈리아 전투의 승리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루비콘 강을 건너는 대목까지이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기원전 100년 7월 12일 로마의 중산층 거주지역에 속하는 수부라 지구에서 태어났다. 당시 최상류층 자제들은 그리스 출신 개인교사로부터 배웠으며 그 다음 상류층은 로도스 출신이나 소아시아 출신교사였으며 여기에도 조금 못미치는 층에 속하였던 카이사르는 어머니 아우렐리아의 개인 지도와 알렉산드리아에서 공부한 갈리아 개인 교사의 지도로 학습하였다. 당시 로마엔 요즘 같은 학교가 없었고 앞서 말한바와 같이 상류층 자제는 문화적으로 앞서 갔던 그리스 출신 선생의 지도를 받았고 라틴어와 함께 그리스어를 배웠다고 한다. 요즘 대학교에 해당하는 상급학교도 그리스 아테네나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그리고 로도스 섬에 있었기 때문에 일부 자제들은 이 곳으로 유학을 가기도 했다고 한다.
주요 7 가지 교양 교과 과목은 라틴어,그리스어 문법, 수사학(레토릭),변증학,산수,기하,역사,지리를 배우는데 아마 카이사르도 이와 같은 과목을 공부했으리라 생각된다고 한다. 카이사르의 출세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이루어졌으며 청장년 시절엔 유흥과 사치로 많은 빚을 지면서 까지 자유 분망한 생활을 하였으나 카이사르의 진면목은 갈리아 총독 시절 유감없이 발휘하기 시작하였으며 이 시절 그가 수 많은 전투를 치르면서도 꼼꼼하게 양피지에 필사본을 만들어 로마에 보내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하였는데 그 기록이 지금 알려진 "갈리아 전쟁기" 이며 갈리아에서 돌아 온 이후 겪은 사실은 "내전기"로 불리워지는데 그 문장은 단순, 간결, 명료함과 세련된 우아함에 힘이 있는 문체로 그 문학적인 가치가 2 천년이 지난 지금도 변함없는 라틴 문학의 정수라고 여겨지는 명문이다.
책을 읽다보면 작가 시오노 나나미는 카이사르란 한 인간에 흠뻑 매료되어 곳곳에 그에 대한 찬사가 나오는데 이는 시오노 나나미 뿐만이 아니라 누구든지 그를 알면 알수록 그에 대한 매력에 빠지게 만드는 인간이라고 생각된다. 카이사르의 인간적인 매력은, 패배자에게 관대하고, 부하에게 많은 재량권을 주고 부하의 실패에도 관대하였으며, 자기의 공까지도 부하에게 돌리는 자세, 사리 사욕이 없었다는 점, 정보 수집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치밀한 전투 계획등으로 항상 싸움에 이기는 장군으로 인식되어 부하들이 믿음으로 추종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또한 많은 여성들과 로맨스를 일으키면서도 그 여성들로부터 원망을 듣지 않았다는 사실은 카이사르의 인간 됨됨이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독일과 영국에서 로마시대에 대한 연구가 많이 진척 되었는데 특히 동독시절의 학자 브레히트는 이 방면에 고명한 사람인데 그가 고대 로마를 연구한 자료를 이용하여 "카이사르 씨의 사업" 이란 소설을 썻는데 거기서 소설 속의 카이사르 비서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예나 지금이나 중요한 금전에 관련하여 카이사르란 인물을 묘사하고 있다.
" 그가 돈 문제로 찾아온 사람들은 어떻게 대하는지를 볼 때마다 내 가슴은 경외감으로 가득 차곤 했다. 그것은 그가 돈에 대해 갖고 있던 절대적인 우월감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돈에 굶주려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남의 돈을 자기 돈으로 만들어 버릴 생각도 없었다. 단지 남의 돈과 자기 돈을 구별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의 일거수 일투족은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돕기 위해 태어났다는 전제에서 출발했다. 나는 돈에 대한 그의 초연한 태도가 채권자들을 불안하게 만들기보다 그들한테까지 전염되는 것을 자주 목격하고 경탄을 금치 못했다. 그럴 때의 그 양반은 저 유명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태연자약 바로 그 자체였다. 예술가는 위대하다. 저속한 것을 이렇게 고양시키고 두 개의 모순되는 개념을 더한층 높은 차원에서 조화시켜 하나로 통일하는 일까지도 거침없이 해내고 있으니 말이다."
나는 가끔 다른 사람들에게 불쑥 질문을 하여 곤란하게 하기도 하는데 그 중의 질문 하나가 클레오파트라가 우리나라 사람으로 치면 어느 시대 누구와 같은 시대였겠느냐고 묻는다. 시대적인 편년에 대한 상식이 있으면 아주 쉬운 답이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자기가 보았던 영화 같은 것에 기준하여 화려한 의상과 화장등을 떠올려 조선 시대 명성황후나 조금 올라가 세종대왕 시대 정도로 생각하여 백여년 아니면 수 백년 정도 이전 사람으로 답을 한다. 그러나 사실 예수 탄생 69년 전이니 2000년도 더 되었고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는 나이 차이는 31살이었으나 둘은 애인 사이로 자녀가 둘이나 있었던 동시대 사람이고 우리나라로 치면 신화 시대에 속하는 박혁거세(B.C.69), 김알지(B.C.65)가 알이나 말에서 나왔다는 시기와 비슷하다. 그러니 다시 말하면 클레오파트라는 박혁거세의 여동생이고 김알지의 누님쯤 된다고 보면 된다.
즉, 우리나라 삼국시대 건국 신화 시대에 이미 로마에서는 공화정이 실시되고 많은 공공건물이 건축되었으며 로마를 중심으로 지방으로 향하는 오늘날의 고속도로와 같은 가도가 구축되었다. 또한 각종 법률이 정비되고 정치적으로도 높은 발전을 보였다고 보면 된다. 우리나라의 역사가 오래 되었다고 자랑하지만 이집트나 로마 역사에 비하면 그리 자랑할만 것은 아니다. 이집트이 피라밋만해도 기원전 2000 년전 으로 추정되는 시기이고 잘 알여진 1922년 발굴되어 세기적 흥분을 일으켰던 투탄카문왕의 분묘에서 수 천점의 유물이 쏟아진걸 보면 비교를 하기 어려운데 그 시기가 기원전 1300년이니......
우리나라에서 요즘 자연 분만에 비해 제왕절개가 너무 무분별하게 시행되어 사회적 문제로까지 부각되는데 바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어머니의 자궁을 절재하여 태어났기 때문에 그의 이름에서 연유하여 처음에 독일어에서 시작하여 영어로 바뀌어 우리 말로는 제왕절개(宰王切開 caesarean section)이라는 어휘가 생성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설에 의하면 caesar 란 라틴어에 찢는다는 의미가 있어서 그로부터 유래했을 것이라는 설도 있어 정확한 역사적 기록은 없다고 하며 시오노 나나미도 여기에 대해 일체의 언급이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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