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후기

로마인 이야기-3 을 읽고...

깃또리 2004. 7. 30. 13:09
 

로마인 이야기-3   BELORUM CIVILIUM 

승자의 혼미

 

 

 1권은 전설에 바탕을 둔 로마의 건국(B.C.753 년)에서부터  기원전 270년 까지

2권은 제1차 포에니 전쟁(B.C. 264년)=한니발 전쟁에서부터 마케토니아를 정벌하여 속주화한 시기(B.C.140년)까지 3권은 제 3차 포에니 전쟁을 승리로 마치고 로마가 지중해 재해권을 확보하고 명장 폼페이우스가 동방 원정을 감행하여 여러 왕국을 굴복시키고 로마의 영역을 흑해 연안과 시리아 예루살렘까지 넓힌 시기(B.C.63 년)까지를 다루었다.

그러나 이 시기는 대외적으로 빛나는 승리와 세력 확장에도 불구하고 로마 내부에서는 세력 다툼에 따른 내전과 반란, 노예급에 속하는 검투사의 반란등이 쉴새없이 일어난 어수선한 혼미한 시기였다.

 

 제일 먼저 대두되는 인물로는 3차 포에니 전쟁인 아프리카 자마 전투의 영웅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외손자이기도한 티베리우스 가이우스 형제는 보통 그라쿠스 형제로 불린다.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30세 전에 이미 호민관에 선출되어 많은 입법 활동을 하여 로마의 기존 제도를 혁신시킨 인물이다.

그라쿠스 형제 다음으로 마리우스 술라는 동방 원정에서 빛나는 전공을 세우고 있는 동안 로마 중앙으로부터 반역자로 지목되었으나 이에 응하지 않고 도리어 로마에 무력 입성하여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타도하고 권력을 강화하여 거의 독재 권력을 발휘하며 기존 제도를 바꾸었다.

마이우스 술라는 전쟁터에서나 생전의 권력 장악에 많은 행운이 따라 스스로 행운아라고하였으며 죽음을 맞아서도 역시 편안한 일생을 마치게 되어 행운아 해당하는 펠릭스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뒤이은 인물로는 술라 생전시 오른팔 역할을 하였던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스트라본 (이름, 일족 명칭, 가문이름)로써 그는 불과 25세에 지금의 스페인 세리토리우스에서 전쟁에 승리하여 로마에 돌아와 개선식을 치러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도 누리지 못한 최연소의 개선 장군의 영광을 차지하였으며 생전에 술라는 폼페이우스에게 마구누스(Magnus=The Great) 라는 별명을 농담 삼아 불러 주었는데 다시 폼페이우스는 알렉산더 이후 로마인으로는 처음으로 동방 원정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개선(B.C.63년) 한 후에 자기 스스로도 거리낌 없이 마구누스라는 별칭 서명을 사용 할 정도였다.

 

이 기간은 폼페이우스를 선봉장으로 하여 로마가 대외 전쟁 수행에서 연전 연승을 거두고 당시 발호하던 지중해 해적도 폼페이우스의 지휘 아래 단기간에 말끔히 소탕한 업적에 힘입어 지중해를 명실 상부하게  로마의 내해(노스트롬 마레)라고 하는데 전혀 손색이 없게 만들었다.

즉, 스페인 서부에서부터 예루살렘까지를 아우르는 방대한 지역을 아우르는 대 제국을 이루었다.

그러나 로마 내부적으로는 술라의 무력 입성에 뒤이은 수 천명 반대파에 대한 피의 숙청으로 포르 로마노를 피로 물들였던 비극적 사건과 검투사들의 반란(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이 장기화 되었으며 정치적으로 내분과 소용돌이가 끊임없이 일어난 불안하고 혼미한 시기로 여겨진다.

이런 혼란한 시기 뒤이어 폼페이우스카이사르, 크라수스가 힘의 균형에 따라 삼두 정치가 열렸다.

 

 독자가 이집트 카이로에 근무하던 시절 지중해를 건너면 바로 로마에 갈 수 있다는 희망에 한 동안 가슴이 설레었다.

그러나 그 당시 우리나라는 이집트와 국교가 맺어진 상태가 아니어서 이집트에 관광 비자로 들어가 편법으로 일을 하던 시기여서 우리의 법적 지위가 퍽 약했었다.

이런 저런 상황에 아무리 가까운 곳이라도 이집트를 벗어난다는게 어려운 실정이었다. 그러나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지중해만 건너면 닿는 코 앞의 이딸리아를 가지 못한다는건 여간 안타까운 일이 아니어서 한 동안 가슴 앓이를 하고 있었다.

 그때 마침 우리가 바로 전에 공사를 마친 준공한 건물을 혼자 관리하던 친구가 나보다 시간이 많이 있어 이런 저런 경로를 통해 이딸리아 행을 주선하여 여름 휴가 4 일동안에 로마에 가자는 제안을 했다.

나는 처음엔 반신반의 했지만 자세히 듣고 보니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공개적으로 주변에 알리고 가는게 아니고 우리 사무실 소장에게만 말하고 갔다 오는 경우였다. 그게 가능한건 우리 소장님이 그 친구의 고등학교 선배여서 겨우 가능했던 것이다.

 하여튼 떠나는 날까지 조마 조마하다 항공기에 올라 몇 시간 지중해를 내려다보며 비행하여 로마공항(정식명: 레오날드 다 빈치 공항)에 도착하여  아! 드디어 로마에 왔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다.

 카이로에서 근무하면서 로마 관광을 위해 한 달 이상을 시간이 날 때 마다 로마 시내 지역의 유적과 역사를 조사하였었다. 우리의 목적지는 로마와 바티칸이었다.

그런데 공항에 도착하여 어디에서 택시를 타나 두리번 거리는데 마침 우리 보다 나이가 지긋한 한국 사람을 만났는데 알고 보니 일이 될려고 그랬는지 우리 소장님과 학교 동창이었고 사우디 아라비아에 근무하는데 발주처가 이딸리아라서 한달에 한 두번 로마에 오는 로마통이었다.

우리의 입장을 듣더니 그 분이 추천하길 로마와 바티칸은 이틀이면 관광이 충분하니 조금 시간을 늘려 로마시가 이딸리아 중앙에 있으니 로마 남쪽은 다음 기회에 보기로 미루고 우선 북쪽으로 가 몇 도시를 보는 방법을 추천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카이로에 돌아가 약간의 질책을 감수하기로 하고 그 분의 조언에 따라 로마 중앙기차역으로 직행하여 피사- 피렌체(플로렌스)- 베네치아(베니스)를 구경하고 다시 내려와 로마와 바티칸을 이틀 동안 관광하여 당초 보다는 2 일을 더하여 6 일간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소장님에게 선물로 양주를 가지고 갔으나 예상대로 상당한 야단을 맞았지만 그래도 그렇게 했던 여행이 평생 남는 추억이 되었다.

 

 그때 그 친구는 아르젠티나를 거쳐 지금은 미국의 유타주 솔트 레이크시티에 살고 있어 가끔 전화 연락을 하고 지내는데 2 년전에 서울에 왔던 그 친구의 딸과 같이 올해도 아들이 고려대에 학점 교환 학생으로 공부하고 있다고 연락이 와서 며칠 후엔 불러서 술이라도 한 잔 사주면서 그 당시를 얘기해 주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