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는 용감했다. 이제 60세가 된 이 초로의 소설가는 마치 자신의 작품 속 주인공인 15살 카프카만큼이나 물러설 줄 모르는 담대함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해서 하루키는 세계 최강국이라는 미국 대통령도, 유엔 사무총장도, 노엄 촘스키나 에드워드 사이드도 결코 하지 못했던 일을 해냈다. 바로 이스라엘 한복판에서 이스라엘인들의 면전에 대고 그들의 팔레스타인 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한 것이다. 이제껏 이스라엘 밖에서 그들의 중동 정책을 비판한 사람은 많았지만, 누구도 예루살렘에서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했다 하더라도, 무사하지 못했으리라).
어떻게 된 노릇인지 알아보자. 한국시간으로 16일, 이스라엘 예루살렘 국제회의장에서는 이스라엘 대표 문학상인 '예루살렘상'의 수상식이 열렸다. 1963년 처음 제정된 이 상은 2년마다 수여되며, 예루살렘 국제도서전실행위원회가 선정한 '개인의 자유에 지대한 공을 세운 작가'에게 주어지고 있다. 물론 이스라엘 따위 나라가 저런 고귀한 목적을 내세우며 상을 준다는 건 -히틀러에게 노벨평화상을 주는 것 만큼이나- 매우 웃기는 일이다. 지금껏 수상자로 선정된 작가들 중 상당수가 수상식에 불참한 것도 그래서다. 2001년에는 수전 손택이, 2003년에는 아서 밀러가 각각 이스라엘의 중동 정책을 이유로 수상을 거부한 사례가 있다. 올해의 수상자로 선정된 하루키 역시 최근의 가자지구 사태 때문에 참석 여부를 심각하게 고민했다고 한다.
하루키는 먼저 자신의 직업인 소설가가 "거짓말 방적공(a spinner of lies)"과도 같다는 언급으로 수상 연설을 시작했다. 그는 "정치인, 외교관 등 거짓말쟁이들이 많지만 소설가와는 다르다. 소설가가 하는 거짓말은 처벌받기는 커녕 오히려 찬사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거짓말의 스케일이 커지면 커질 수록, 그에 비례해서 찬사도 더욱 커진다"면서, 소설가의 거짓말이 갖는 가장 큰 차이점은 "거짓을 통해 진실을 발견하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하루키는 자신이 수상자로 선정된 뒤 세계 각지의 팔레스타인 후원단체와 독자들로부터 '수상을 거부하라'는 요청이 쇄도했음을 언급했다. 이어 그는 "이스라엘을 방문하는 것이 적절한 일인지를 놓고 오랫동안 고민했다. 결국 나는 여기에 오는 쪽을 선택했다. 이는 자신의 견해와 반대되는 것도 확인해보기를 원하는, 그리고 직접 눈으로 보거나 만져보지 못한 것은 좀처럼 신뢰하지 않는 소설가의 직업적 본성 때문이다. 나는 직접 눈으로 보기로 결정했다. 침묵보다는 말하는 것을 선택했다"며 자신이 수상식에 참석하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여기서부터 하루키는 본론으로 들어간다. 그는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격에서 "1,000명 이상이 사망한 점", 그리고 피해자 중 다수가 "무장하지 않은 어린이와 노인들이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어 하루키는 가자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딱딱하고 높은 '벽'과 깨지기 쉬운 약한 '달걀'의 충돌에 비유했다. 그는 "벽이 올바르고 달걀에 잘못이 있는 경우라도, 나는 달걀의 편에 설 것"이라면서 그 이유로 "인간은 모두 연약한 껍질에 둘러싸인 유일한 영혼"인 반면, 우리 각자가 맞서게 되는 높은 벽은 "우리가 개인으로서는 결코 하지 않을 일을 강요하는 시스템"이라는 점을 들었다. 대량살상무기 공격이나 자살폭탄테러를 하도록 강요하는 체제를 '벽'에 빗대어 비판한 것이다.
하루키는 자신이 소설을 쓰는 유일한 이유는 "개개인의 존재가 지닌 독특함과 성스러움을 그려보이는 것"이며, "시스템이 사람들을 도탄에 빠뜨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사회적-이념적인 주제보다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주로 다뤄온 자신의 작품 세계에 대한 언급인 셈이다. 이어 그는 "너무도 높고 어둡고 차가운 벽에는 아무 희망이 없다. 사람들은 벽이 우리를 지켜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벽은 우리를 죽이고 또 다른 사람을 죽이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며 이스라엘의 분리장벽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계속해서 그는 "벽에 맞설 수 있는 건 우리의 영혼이 지닌 따뜻한 힘 뿐이다. 시스템이 우리를 좌우하도록 두어서는 안된다. 우리를 이끌 수 있는건 우리 자신이다. 시스템을 창조한 것 역시 우리 인간이다"라고 열변을 토했다. 마지막으로 하루키는 "내 책을 읽어준 이스라엘의 독자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우리가 서로 의미깊은 무언가를 마음에 공유하고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독자 여러분은 내가 이 자리에 오게 된 가장 큰 이유"라는 말로 연설을 마무리했다.
하루키의 수상 연설이 있은 뒤, 일본의 각종 언론은 하루키의 연설 내용과 이스라엘 관련 언급에 대해 앞다투어 비중있게 보도했다. 일본 언론들은 대부분 하루키의 발언에 대해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반면 이스라엘 현지 언론의 보도는 비판 일색일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의외로 차분했다. 단 비판적인 언급은 하지 않되, 수상식에 참석했다는 사실에 중점을 두어 보도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였다. 아사히 신문에 따르면, 이스라엘 유력지 <하아레트>는 하루키의 강연이 '시적'이었으며 '가자지구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발언했다는 점을 보도했다고 한다. 또한 영문판인 <예루살렘 포스트>에서는 하루키의 소감이 '난해했다'면서, 그가 '시차와 정치적 반대를 무릅쓰고 예루살렘에서 수상식에 참석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번 하루키의 '예루살렘상' 수상이 '개인적인 것이 곧 세계적이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 사례라면, 하루키의 연설 내용은 특유의 탈정치적 개인주의가 어떻게 정치적으로 올바른 입장을 취할 수 있는지 보여줬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소설가로 그 자리에 섰지만, 그 어떤 정치가나 혁명가의 이스라엘 비판보다도 효과적이고 인상적인 방식으로 자신이 아는 '진실'을 이야기해 보였다. 하루키는 용감하게 그 자리에 서서, 마음을 움직이는 비유와 정제된 표현을 사용해서 자신의 소설에서 핵심 주제이기도 한 '인간'을 이야기했다. 하루키의 호소가 과연 그 자리에 있던 이스라엘인들에게 어떤 변화를 주었을지는 미지수이지만, 적어도 불참하는 것보다는 몇 배나 큰 파급효과를 가져온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하루키의 용기와 담대함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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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그리움 그린 그림
글쓴이 : 초록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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