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 이야기 -5
로마인 이야기-5 C.ILIUS CAESAR
율리우스 카이사르 -하
우선 로마인 이야기를 읽다 보면 많은 사람이 등장하는데 이 사람들의 나이를 아는게 읽고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어 일단 주인공 카이사르의 나이를 기준하여 주변 인물을 적어보면,
카이사르(B.C.100 출생) 52 세 :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와 첫 만난 시기
폼페이우스 58 : 카이사르와 경쟁하던 장군
키케로 58 : 로마 최고의 문필가, 변호사, 원로원
안토니우스 34 : 카이사르의 오른팔 역할을 한 장군
옥타비아누스 15 : 카이사르 제1후계자로 초대 황제
클레오파트라 21 : 이집트 여왕이며 카리사르의 애인
마르쿠스 부루투스 37 : 카이사르 암살 주동자
아그리파 14 : 옥타비아누스의 오른팔 역할을 한 장군
아티쿠스 61 : 키케로 친구이자 실력자
데키우스 부루투스 35 : 카이사르 암살자 일원, 카이사르 제2후계자
로마의 과두정 시기 정치구조는 귀족의 원로원, 평민의 대표인 민회에서 선출한 호민관, 원로원이 선출하는 두 명의 임기 1년 집정관으로 구성되고 신을 관장하는 종신직 최고제사장이 있었다. 로마의 정치권력의 직책은 최고제사장만 제외하고 대개 복수로 임명되는게 특이하다.
원로원 의원들은 카이사르가 갈리아에서 보내오는 연전연승 소식에 환호하면서 한편으론 그의 야망을 경계하여 카이사르에게 무장 해제 후 귀국하라고 지시한다.
카이사르는 당시 로마의 국경선인 이딸리아 북부 루비콘 강에서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결국 원로원에 반기를 들기로 결심하고 루비콘강을 건너 로마에 무혈입성한다.
여기서 결단을 내릴 때 흔히 사용되는 "주사위는 던져졌다"라는 말이 그리고 이미 중대한 결정이 내려졌을 때 "루비콘 강을 건넜다"라는 말이 유래한다.
왜냐면 당시에 루비콘강은 이딸리아 북부의 작은 강이었으며 로마 본국의 경계선으로 로마에 들어오는 누구든지 본국 경계선을 넘을 때는 군대를 버리고 들어 와야 하는 국법을 처음으로 어기고 카이사르가 로마에 입성하였기 때문이다.
이때 카이사르가 한 또 한 말은 " 내가 루비콘 강을 건너면 세상이 뒤바뀌고 내가 강을 건너지 않으면 내가 파멸한다"라는 의미있는 얘기를 했다고 한다.
제 5권은 여기서 부터 시작하여 원로원파를 지지하는 부르투스일당의 칼을 맞고 쓰러지고 그의 후계자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의 반대파를 하나하나 평정하고 경쟁자 안토니우스를 물리쳐 명실상부한 제 1인자가 되어 황제가 되는 시기를 끝으로 한다.
이 기간은 로마 역사상 가장 극적이고 변화무쌍한 시기이고 카이사르의 능력이 절정에 이르게 되며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가 등장하여 역사에 흥미가 없는 일반인에게도 관심과 흥미를 갖게하는 부분이다.
우선 카이사르의 영토확장의 활약상을 간추려보면 서쪽으로는 제일 먼저 알프스 너머 지금의 프랑스 전 지역과 라인강을 경계로 하여 독일 중부지역을 석권하였다.
예전부터 이 지역을 갈리아 또는 골 지역이라 불렀으며 카이사르가 8년간의 긴박한 죽음과 삶을 넘나 드는 전쟁 기간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업적을 로마에 알리는 동시에 후세에 역사기록을 남기려는 목적으로 뛰어난 문장력을 발휘하여 많은 사람들이 라틴 문학의 정수로 인정하는 "갈리아 전쟁기" 8 권을 썼다.-7 권까지는 직접 마지막 8 권은 구술에 의한 대필.
원로원의 견제에 대응하기 위해 카이사르는 당시의 실력자와 재력가인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와 함께 비공식적인 삼두정치를 시작하였다.
나중에 옥타비아누스의 삼두정치와 비교를 위해 제 1차 삼두정치라고도 한다.
당시 폼페이우스는 젊은 나이에 오늘날의 스페인 지역을 평정하고 뒤이어 동방의 여러 지역을 로마의 세력권으로 두었으며 지중해 해역에 날뛰던 해적도 소탕하는등 영어에 The Great 에 해당하는 "마구누스"라는 호칭을 이미 받은 상태였으나 장년에 이르면서 지난날의 용맹이 쇠퇴하여 카이사르와 경쟁하는 사이였으나 세력이 부족함을 느껴 결국 원로원와 결탁하여 카이사르에 대항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그리스로 건너가 카이사르와 일전을 준비하였다.
이에 대응으로 카이사르가 기병하여 우선 폼페이우스의 지지기반이고 거점인 서쪽지역 에스파냐를 제압한 다음 동쪽으로 도망친 폼페이우스를 추격하여 BC 48년 8월 그리스의 파르살로스에서 이를 격파하였다. 그후 패주하는 폼페이우스롤 쫓아 이집트로 향했으나 그가 알렉산드리아에 상륙하기 전에 폼페이우스는 이집트에 발을 딛기도 전에 알렉산드리아 항구 입구에서 이집트 환관들에게 살해 당한다.
젊은 시절 로마인들의 우상이었던 폼페이우스의 생은 이렇게 이국에서 허무하고 비참하게 58세의 생을 마감하였다.
뒤쫓아 도착한 카이사르는 비록 정적이었지만 옛 동료이며 로마인인 폼페이우스에 대한 연민의 정과 예우로 그의 시체를 잘 수습하여 로마로 보내고 폼페이우스를 살해한 무리들을 처벌한 다음 당시 꽃다운 나이의 22세 클레오파트라와 만나 운명적인 역사적인 로맨스를 시작하고 두 달 동안이나 모든 일을 잊고 나일강을 유람하는등 이집트에서 꿈같은 휴가를 보내기도 한다.
이 시기에 클레오파트라에서 얻은 두 아들 중에 하나가 작은 카이사르라는 의미의 카이사리온이란 아들이고 후일 옥타비아누스에 목숨을 잃는다.
이어서 카이사르는 기원전 47년 소아시아 젤라로 출병하여 미트리다테스 대왕의 아들 파르나케스를 격파하고 이때,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veni, vidi, vici)" 의 단 세 마디로 된 유명한 보고서를 원로원에 보냈으며 이는 카이사르의 기지와 단순함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명언으로 후세가 기억하고 있다.
다음으로 스키피오가 이끄는 폼페이우스의 잔당을 속주인 아프리카 북부 지금의 리비아 지역인 탑소스에서 소탕하고 오랫동안 공화정의 실권을 쥐고 있던 원로원 지배를 완전히 타도하였으며 오래 지속 되었던 내란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러한 사실을 내란기로 기록하기도 하였다.
카이사르는 동방 원정시에 시리아, 흑해 연안과 이스라엘 지역을 동맹 관계로 묶어 두며 로마의 세력권으로 두었다.
동방을 제패한 카이사르는 옛 카르타고 지역에 발흥하던 누미다아 왕국을 궤멸시켜 명실 상부한 지중해를 내해로 삼는 대 제국을 이룩하였다.
대부분의 영웅호걸은 호색한이란 말을 입증하듯 이에 전형적인 인물이 아마 카이사르가 아닌가 한다.
그는 이집트의 여왕 뿐만이 아나라 당시 로마에 있는 여러 양가집 유부녀들과 애인이나 연인관계를 맺었으나 그가 여성 문제에서 뛰어난 점은 관계한 여인들에게 자기 자신의 최선을 다했으며 끝까지 모든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정치 이념이 달라 카이사르가 죽이기까지 한 사람의 부인이며 자기 애인과 그 아들들은 성심을 다해 보살펴주고 경제적인 도움을 주었으며 아들의 경우 관직에 등용하도록 도와 주고 끌어주었다는 것이다.
사실 카이사르는 여성들에게만 이런 태도를 보인게 아니고 자기의 목숨을 노렸던 적의 장수나 부하들까지도 복종을 약속하면 용서를 하고 자기 사람으로 끌어 들였다.
이러한 카이사르의 철학을 관용(클레멘타리아)라고 한다.
또 로마는 전통적으로 타 민족을 제압해도 그 민족의 종교, 언어와 정치체제를 인정하였고 흡수합병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적절한 식민지 관리를 시행했는데 카이사르는 한발 더 나아가 속주출신이라도 인물이 뛰어나면 출신지에 관계 없이 참모로 기용하거나 고위관직에 등용시키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심지어 노예 출신이라도 그 능력을 높이 사 중요한 직책인 재정 관리인으로 등용시켜 원로원의 불만을 살 정도였다.
결국 이러한 관용정신이 덫이 되어 카이사르의 운명을 단축시켰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암살자 일행의 대표격인 마르쿠스 부르투스는 그의 아버지가 카이사르에 대항하다가 처형된 사람이고 그의 어머니 세르빌리아는 카이사르의 공공연히 소문난 애인으로 당시 미망인이 재혼이나 이혼하는게 전혀 허물이 되지 않았던 시기인데도 재혼을 하지 않고 카이사르와 연인 관계를 지속하였는데 아들 부르투스가 정적 폼페이우스편에 가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세르빌리아의 부탁으로 자기 아들 이상으로 돌보아 주고 후원하였으며 관직에 오르도록 하였다.
결국 카이사르는 이 마르쿠스 부르투스가 주동하는 원로원파 일당의 암살단에 목숨을 잃었다.
이 시기에 활동한 유명한 인물 중 하나인 카토는 카이사르 반대파로써 위대한 사상가이며 공화파로 카이사르와 맞서다 할복 자살한 인물인데 카토는 암살자 부르투스가 소년 시절부터 숭배하던 인물이고 작은 아버지가 된다.
이런 전후 사정으로 보아 최소한 부르투스같은 인물은 주변에서 배제함이 마땅하였는데 그를 신임하다 그를 필두로한 14 명의 공화파 암살자의 손에 23군데의 상처를 입고 절명하게 되는데 이 불세출의 영웅의 마지막 말이 " 부르투스 너 마저도......" 라고 알려져있다.-후일 배신 당하는 상황의 대명구가 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사실 14명의 암살자 일행 중에는 부르투스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 둘인데 다른 한 사람은 데키우스 부르투스로 역시 카이사르가 총애하던 젊은이로서 카이사르 사후 발표한 유언장에 보면 옥타비아누스가 제1 상속자 즉, 제1 후계자 그리고 제2 상속자는 데키우스 부르투스로 되어있기 때문에 역사 학자들은 카이사르가 외친 사람은 마르쿠스 부르투스가 아니라 데키우스 부루트스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카이사르는 자기에게 충성 서약을 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암살 당일호위병도 없이 원로원 회의를 주재하기 위해 폼페이우스 회랑에 단신으로 나타나 암살 적극 가담자 부르투스를 비롯한 14명이 우르르 달려들어 단검으로 난자하여 차디찬 대리석 바닥에 쓰러졌는데 그이 나이는 아직 한참 일할 56세였다.
때는 기원전 44년 3월 15일이었다.- 서양에서는 2천년이 지났는데도 이 역사적이고 비극적인 날을 기려 "3월 15일" 이라고 하면 역사적인 비극일로 간주하기도 한다.
재미있는 일은 암살 당시 마침 클레오파트라가 카이사르의 초청으로 로마에 와 있다가 카이사르의 비극을 보게 되고 유언장 발표도 듣게 되는데 카이사르의 아들인 카이사리온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고 자기 신상에 대한 얘기도 없자 화가 나서 바로 이집트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러나 후세의 사가들은 카이사르가 오히려 클레오파트라를 아꼈기 때문에 유언장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사실은 차후에 일어나는 역사적 사실로 유추 할 수 있다.
갑자기 카이사르가 죽자 당시 정치적 실권을 이어 받을 사람은 안토니우스였는데 실재 유언장에는 의외로 카이사르의 누이 동생의 손자이고 즉 카아사르에게도 손자뻘이 되는 18세의 옥타비아누스였다.
안토니우스는 일단 원로원과 관계를 벌어지지 않게 한 다음 점차 반 카이사르파를 제거한다.
유언장에 후계자로 지목되었지만 18세의 나이에 주변 추종세력도 없는 옥타비우누스는 안토니우스, 레피두스와 함께 제 2차 삼두정치를 선택한다.
카이사르가 이룬 1차 삼두정치는 비공식이었던데 반해 2차 삼두정치는 공식적이었다.
이에 위기를 느낀 반카이사르파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우누스에 대항하다 차례로 축출되는데 부루투스는 그리스에서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연합군에 대항하다 세불리를 느껴 43세로 자결하고 나머지 암살자들도 모두 축출되게 된다.
이 시기에 로마 역사를 통틀어 뛰어난 사상가이고 문필가로 인정되는 키케로는 카이사르 생존시에 카이사르와 정치 성향은 달랐지만 문예 활동이나 철학 사상으로는 당대 제 1인자로 만인이 인정하였고 카리사르도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조언을 부탁하는 지식인이었으나 철저한 공화파로서 정치적으로는 카이사르에 반대했으며 암살자 일원인 부르투스와 카이우스의 정신적인 지주였다.
이를 알고 있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과감하게 살생부 1 번에 키케로를 올려 목과 손을 잘라 포르 로마노에 효수하는데 당시 키케로의 나이는 63세였다.
그러나 후일 옥타비아누수가 황제가 되어 노년기에 황손들이 키케로의 글을 읽는것을 보고 황제는 "그의 글은 로마에서 가장 뛰어난 글이야 많이 읽고 배우라" 고 했다 한다.
즉 자기 손으로 키케로를 죽였지만 그의 문장과 학식에 대한 인정은 최고로 하였다는 얘기이다.
카이사르 반대파가 축출된 후에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우누스의 권력 다툼이 벌어졌다.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와 손을 잡고 옥타비아누스와 싸웠으나 그리스 내륙 필리피 전투에서 패하고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연합 함대는 악티움 해전에서 또 다시 패하여 둘은 이집트로 도망갔다.
세 불리를 인정한 안토니우스는 로마 동방을 로마 서방과 분리하여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자기들의 세력권으로 삼으려 했으나 결국 카이사르의 적자인 옥타비우누스의 공격에 무너지자 안토니우스는 자결을 결심하고 마지막으로 클레오파트라의 목숨을 살려주기를 부탁하나 옥타비우누스가 거절하자 결국 안토니우스는 자결하여 사랑하는 클레오파트라의 품에서 51세의 생을 마친다.
로마의 영웅 두 사람과 세기의 로맨스를 일으키고 뛰어난 머리를 가진 클레오파트라도 이제 나이가 40 이 다 되었고 대 제국을 이어 받아 한창 책임감에 충만하며 성격적으로 냉정한 34 세의 옥타비우누스를 사랑의 포로로 삼을 수 없음을 간파한 클레오파트라는 자기의 운명이 다했음을 예감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옥타비우누스는 자기를 후계자로 세워준 카이사르의 애인인 클레오파트라를 직접 손을 대지 않고 자기 스스로 행동하여 클레오파트라는 무화과 열매 광주리에 독사를 함께 담아 침실에 가져오라 하여 독사에 가슴을 물려 죽는 방법으로 자살하여 파란만장한 삶을 맺는다.
어쩌면 구차한 삶을 살기 보다 죽음을 택한 클레오파트라는 현명한 선택이었는지 모른다.
냉정하고 침착한 옥타비우누스는 후환을 없애기 위해 카이사리온은 죽이고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와 사이의 두 아들은 로마로 데려가기로 하고 이집트는 황제 영지는 삼기로 결정하였다.
카이사르의 죽음 이후 16 년간의 옥타비우누스와 안토니우스의 싸움은 끝이 나고 옥타비우누스는 로마로 개선한다.
때는 기원전 30년 으로 오랫동안 열려있던 전쟁을 담당하는 "야누스"신전의 문도 닫히게 되고 평화가 시작되었다.- 영어1월(January)의 어원이 되기도 하는 두 얼굴을 가진 전쟁신 야누스의 문은 로마가 전쟁시에 열어 놓고 평화시엔 닫는 관습이 있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