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에 대하여...
" 제국주의 " 에 대하여...
참고문헌 : 서양문화사(민석홍, 나종일, 이민호) 서양사 총론(차하순) 서양사 강의(배영순) 문화사(이혜령외 8 인)
* 흔히들 제국주의라는 단어를 곧잘 사용하는데, 이에 대한 의미를 확실히 하기 위한 간단한 소논문입니다. 참고 하시길 바랍니다.
1. 머리말
제국주의(帝國主義 imperialism)에 대한 이해는 일반인들의 상식 범위부터 시작하여 이 방면의 깊은 연구성과를 거둔
학자들의 견해까지 다양한 입장과 분석이 있다.
영국의 저널리스트 J. A. 홉슨의 帝國主義論(1902), 오스트리아 R.
힐퍼딩의 金融資本論(1910) 카우츠키의 초제국주의론, J.A. 슘페터의 제국주의 사회학(1919), V.I. 레닌의 자본주의 最高段階로써의
帝國主義(1917)등 이미 1900년대 초부터 제국주의에 대한 폭 넓은 연구가 진전되었다.
특히 V.I. 레닌의 저서는 제국주의에 대하여 가장 포괄적이고 역사적 정의에 충실했다고 볼 수 있다.
비록
제국주의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세계 역사 흐름에서 가장 크게 영향을 발휘하였지만, 아직도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국제관계에
엄연히 존재하는 실체이다.
특히 급격히 변모하고 갈수록 냉혹해지는 국제질서 아래서 모습을 달리하여 우리곁에 나타나는 제국주의의 검은 그림자에 대응해야 할 입장에 있는 우리의 현실에서 이에 대한 충분한 고찰이 요구된다.
더구나 이웃 일본의 제국주의 야망에 국권을 상실하고 치욕의 역사를 지닌 우리로써는 제국주의에 대한 명확한 인식의 바탕 위에 다가오는 21세기에 우리의 나아갈 방향 모색이 중요하다고 판단 되어 정확한 제국주의의 개념과 형성과정, 아울러 각국의 제국주의가 어떻게 발전진행 되었는지를 서술키로 한다.
2. 帝國主義 槪念
帝國主義 語源 임페리움(imperium)은 원래 로마시대 명령과 권력, 특히 ‘법에 의한 명령’ 을 뜻하는 일반명사였지만
카르타고 전쟁 이후에는 로마에 의한 타민족 지배라는 개념으로 변모하였다. 이 말이 후에 일반화 과정을 밟게 된 사실은 프랑스에서 나폴레옹 3세의
몰락을 보도한 영국신문 데일리 뉴스(Daily News) 보도 이후였다.
1870년 6월8일자 이 신문은 나폴레옹 3세의 제
2제정을 帝國主義라 부르고 전제정치와 같은 뜻으로 사용하였다. 그런데 이 말이 사회적으로 의미를 부여 받은 것은 1877년 이후로써 영국수상
B. 디즈레일리는 러시아가 콘스탄틴노플을 점령하려고 하자 이에 대항하여 무력행사도 불사하겠다는 대외정책을 발표하며 이때부터 제국주의는
열광적인 主戰論, 혹은 배타적 대외정책을 뜻하기도 하였다.
1) 廣義의 帝國主義
한 국가가 정치, 경제, 군사적 지배를 타 지역에 확장하려는 일체의 침략주의적 경향을 말하며 근대초 유럽의 지리적 팽창과 관련이 있다.
2) 狹義의 帝國主義
자본주의가 고도화 되면서 원료 확보나 상품수출, 잉여자본의 해외투자를 위한 후진지역으로의 진출과, 이권 확보가 가능한 해외 식민지 획득을
도모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즉, 서방의 제국주의는 1870년대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V.I. 레닌의 개념으로는
19세기말부터 시작된 자본주의 최후 단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3) 古典的 帝國主義
산업혁명으로 부국이 된 서양의 열강은 1870년대부터 노동력이 싼 후진지역을 보호국으로 만들거나 그 일부를 자신의 세력범위로
만들어서 본국에서 남아 도는 자본을 수출하여 식민지 경영을 하는 제국주의적 경량을 보였으며, 19세기의 각국은 민족주의로부터 파생된 국가주의로
세계 진출을 격화시켰다.
이처럼 고전적 제국주의의 시기는 자본의 수출이라는 새로운 단계의 자본주의 그리고 민족주의에서 발전한 국가주의를
배경으로 했던 1870~1914년을 말한다.
4) 다양한 槪念에 의한 帝國主義
1. 經濟的 帝國主義
선진 경제국과 후진국들이 상호 협력체제를 구축하여 후진국 근대화를 앞당길 수 있다는 주장이다.
2. 文化的 帝國主義
帝國主義를 통하여 유럽의 우수한 문화를 미개한 지역에 전파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3. 社會的 다원主義
C. Darwin의 생물학, 유전적 진화론을 응용하여 적자생존의 법칙에 따라 약소국은 강대국에 의해 지배당하는 것은 보편적이고
당연하다는 주장이다.
4. 心理的 帝國主義
유럽 이외의 타 지역으 개화시킬 사명감과 기독교의 전파와 백인이 가장 우수한 종족이라는
인종적 우월감의 주장과 함께 유럽에게 이로우면 식민지에도 좋다는 독선적 심리상태의 주장이다.
3. 帝國主義의 形成
15세기 아메리카 대륙이 발견되고 포르투갈이 동양에 전진기지를 마련하였으며 16세기 스페인은 라틴 아메리카에 식민지를 개척하였다. 17세기에 들어서서 영국과 프랑스는 북아메리카에 경쟁적으로 식민지 확보에 열중하였으며 19세기에 그 과정의 완성을 보였다.
그러나 이 같은 식민지화는 19세기 후반의 帝國主義에 비해서는 상당히 제한적인 성격을 나타낸다. 19세기 후반의 산업화는 중공업, 화학공업, 군수산업으로 확대되어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발전됨에 따라 자본이 집중되어 대기업이 소기업을 잠식하고 다시 대기업은 상호 협력하여 기업 결합 형태를 취하여 이른바 카르텔(Cartel), 트러스트(Trust), 콘체른(Conzern)을 형성하여 자본주의는 독점자본주의, 금융자본주의의 단계에 진입하였고 국내의 축적된 잉여자본을 투자대상 지역을 찾아 정부의 지원아래 불꽃튀는 식민지 쟁탈에 돌입하였다.
새로운 제국주의 양상은 지난날의 단순한 식민주의를 넘어서서 19세기 후반의 사회적 다원주의(Social
Darwinism)에 의해서 더욱 견고해졌으며 선교사들의 종교적 사명감과 세계를 이끌고 개발할 책임이 유럽인에게 부여되었다고 하는
키플링(Kipling)의 ‘白人의 짐’ -White men’s burden - 와 같은 주장이 식민지화의 정당성을 뒷받침하였다. 또한 후진지역의
지배층들은 유럽의 경제진출을 정당화하여 받아들임으로써 자국의 근대화를 실현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이에 동조하게 되었던 것이다.
4. 各國의 帝國主義
1) 英國의 帝國主義
영국은 지리적으로 섬나라이고 국토가 협소하여 일찍이 해상을 통한 해외 진출을 꾸준히 시도하였다. 18세기에 세계 최대의 식민지 제국을 건설한 영국은 이집트의 재정난을 악용하여 수상 B.디즈레일리는 1869년 개통한 수에즈운하 주식을 급히 매입하여 운하 소유권을 확보하여 인도로의 통로 확보를 공고히 하였다.
이집트에서 아라비 파샤(Arabi Pasha)가 이에 대항 반란을 일으키자 이 기회를 이용 출병하여(1882) 이집트를 실질적인
보호국으로 삼았다.
이집트에 이은 남쪽의 수단과 우간다도 보호령으로 흡수하고 지금의 케냐에 해당하는 지역을 동아프리카로하여
보호령으로 삼음으로 나일강이 흐르는 전 지역을 효과적으로 장악하고 소위 아프리카 종단정책(縱斷政策)을 착실히 수행하였다. 남부 아프리카
지역에서는 일찍이 네덜란드인들의 후손인 보어(Bores)인의 트란스발(Transval)에서 금이 생산되고 오렌지 자유귝(Orange Free
State)에서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자 케이프 식민지를 거점으로 침투하여 보어전졍(1899~1920)을 일으켜 승리하여 두 나라를 합병하여
남아프리카 연방(The Union of Africa)을 세웠다.
결국 독일의 위협으로 영국은 영·불 협상(1904), 영·러
협상(1907), 불·러 협상을 성사시키고 후일 별개의 세 협상을 합하여 3국협상(Triple Entente)라고 하며, 삼국동맹에 대항하는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게 되었다.
인도의 광대한 지역에서 산출되는 천연자원과 노동력에 관심을 기울이던 영국은 1757년 벵골, 플라시
전투에서 승리하여 사실상 식민지 정책을 시작하였다. 초기에는 동인도 회사를 통한 지배에서 직접통치(1813)로 전환하였으며 1857년
대반란(세포이 반란)을 계기로 더욱 지배체제를 강화하엿고 인도 식민지역을 원자재의 공급지, 제품의 소비지화 하였다.
이에
대하여 조세국장이었던 존 술리반(John Sullivan)의 표현처럼 “인도에서 영국으로 부의 유출은 마치 스펀지로 갠지스강의 모든 것을
빨아들여 템즈강에 짜는 것 같다.” 라는 정도의 혹독한 유출 정책을 수립하여 식민지 인도의 황폐화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오스트레일리아(Australia)에는 18세기 후반부터 이주민을 보내 19세기 중엽에는 자치령으로 승격시키고 뉴질랜드 역시
영국의 연방화(1907)가 이루어졌다.
중국으로의 진출은 청조 말의 혼란을 틈타 아시아 지역 진출을 열망하던 영국은 인도의
동인도 회사가 중국과 무역거래에서 결재 수단이었던 금의 부족사태에 직면하자 이의 타개책으로 인도 생산 아편을 중국에 공급하게 되고 이에 반발하는
중국과 아편전쟁(1840)을 일으켜 승리하였다. 이에 따른 남경조약(1842)에서 홍콩 섬을 할양받고 애로우 사건에 이은 2차 청·영
전쟁(1856)의 승리로 불평등 조약인 천진, 북경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로써 양자강 유역 일대를 세력권에 두어 중국에서의 본격적 帝國主義的
식민정책의 개막이 시작 되었다.
중국에서의 세력 확대는 처음 조차지 획득, 조계설정으로 행정, 경찰, 사법을 관할하고 이권 활동을 펼치는 방식을 채택하였다. 중국 민중의 많은 저항을 물리치고 프랑스, 러시아, 일본, 독일과 함께 지역적으로 분할점령 형태를 취하였으며 홍콩 섬을 100년이란 긴 기간을 영국의 세력권에 둘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2) 프랑스의 帝國主義
북부 아프리카 알제리를 1830년 획득하여 거점화하고 남으로 광대한 사하라 지역과 적도 아프리카를 지배지역으로 삼았다. 1881년에는 동진하여 튜니스(Tunins)를 얻고, 서쪽의 모로(Morocco)에 세력을 확대하는 한편 동해안의 마다카스카르(Madagascar)를 획득(1893)하였다.
덧붙여 프랑스 소말리랜드 드 지부티를 구입하여 에치오피아를 향한 철도 부설 계획을 세워 소위 프랑스의 아프리카
횡단정책(橫斷政策)을 실시하여 영국의 종단정책과 마찰을 빚었다.
아프리카 분할 점령에 가장 적극적인 영국과 프랑스는 결국
나일강 상류 백나일의 파쇼다(Fashoda)에서 프랑스기 게양사건으로 영국과 전쟁 일보 직전에 다다랐으나 프랑스의 후퇴로 수습되는 등 양국의
각축에 따른 크고 작은 충돌이 잇따랐다.
동남 아시아에 진출한 프랑스는 베트남 다낭점령(1858)을 시작으로 1조약에 이은 제 2차 천진조약(1885)이 프랑스와 청
사이에 체결되어 청 대신 베트남 전역에 대한 지배권 획득에 성공하였다.
캄보디아를 1887년 프랑스 인도지나 총독의 지배하에
두었고 라오스는 프랑스 보호령으로 두어 이른바 불령 인도지나(French Indochina)가 성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3) 獨逸의 帝國主義
프랑스와 영국에 비해 뒤늦게 산업화를 이룩한 독일은 그 경제적인 이익을 위해 이미 두 나라가 차지하고 있던 경제적 기반에
침투하지 않을 수 없었다. 鐵血首相이라 불려진 비스마르크 Otto Von Bismark(1815~1898)는 독일 통일 과업을 완수하고 수상으로
재임 기간 국제 관계의 목표를 유럽의 평화, 현상유지에 두고 독일의 경제적 기반에 우선하였으며 프랑스에 대해서는 고립정책으로 일관하는 소극적
외교 정책으로 일관하였다.
이러한 그의 탁월한 외교술의 노력으로 유럽의 세력 균형과 평화상태가 존속되었으며 독일을 중심으로
러시아 오스트리아 간의 3제 동맹이 체결되었고 (1881) 각국의 국경선 유지, 발칸 문제의 평화적 해결, 혁명 운동의 저지를 목표로 삼았다.
그 후 발칸에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이해관계가 날카롭게 대립하고 프랑스가 튀니지를 보호국으로 삼았던 1878년 비스마르크는 베르린 회의를
개최하여 영국의 지원을 받아 발칸에서 러시아 세력을 억제하는데 성공하였다.
이탈리아는 프랑스와 관계가 악화되자 독일에 접근하여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를 묶어 삼국동맹(Triple Alliance)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1890년 비스마르크 사임 후 신 황제 빌헬름
2세는 국제 관계의 실리적이고 평화적 외교술을 구사했던 비스마르크와는 달리 적극적 외교 정책을 표방하여 주변 열강을 자극함으로써 특히 영국의
‘영광스런 고립(Spliended Isolation)’ 정책을 거두어들이는 계기가 됐다.
아프리카 진출은 처음에는 서남 아프리카
지역을 싼 값에 매입하여 2년 뒤 보호령으로 선포함으로 시작 아프리카·기니아만 일대와 합병 독일령 카메룬이 되었고 1885년 동아프리카를
획득하여 1890년 보호령화하여 식민지 경쟁에 늦게 출발하였으나 독일령 아프리카 식민지는 그 크기나 자원조달 측면에서 결코 뒤지지
않았다.
독일의 3B정책과 영국의 3C정책 :
독일황제 빌헬름 2세는 세계분할이 거의 끝날 무렵 터키 지역에 큰 관심을 가지고 그곳을
방문(1898)하는 등 적극적 정책을 취하여 비잔티움(현:이스탄불)과 바그다드간의 철도 부설권을 획득하여 이를 베를린과 연결하는 이른바 3B
정책을 취했다. 이리하여 영국이 취한 케이프 타운, 카이로, 캘커타를 연결하는 3C 정책과 충돌하는 결과를 낳았다.
모로코 사건 : 독일이 철강생산에서 영국을 앞지르고 각종 산업의 비약적 발전을 보여 유럽의 맹주로 자리잡았으며 세계 1급의 해군 건설로
독일 해상무역을 보호하겠다는 정책이 발표되었다. 기존 해상권의 우위국인 영국과 해군증강경쟁이 建艦競爭으로 이어졌으며 힘에 바탕한 독일이 모로코
문제에 간섭하기 시작하여 프랑스와 제1차 모로코 사건(1909)과, 제2차 모로코사건(1911)이 일어나 유럽에 전운이
감돌았다.
중국지역 진출은 열강의 진출과 함께 선교사 살해사건(1897)을 계기로 중국 정부에 압력을 가하여 교주만 일대를
조차하는데 성공하여 아시아 지역에 대한 식민지 경영에 참여할 수 있다.
4) 이탈리아의 帝國主義
국내문제 해결이 바쁜 이탈리아는 여타 유럽열강보다 식민지 경영에 일찍 대처하지 못하고 1860~1870년대 통일이 된 뒤
1880년 이후부터 아프리카에 큰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프랑스가 튀니지아를 보호령으로 하자 실망과 프랑스에 대한
적대적 입장을 취하였다. 1885년 마사우아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아비시니아를 장악하려다 실패하자 대신 홍해연안의 에리트리아와 소말리랜드를
획득하였다.
그 후 지중해 연안 맞은편 트리폴리와 키레나이카 지방에 눈을 돌려 터키-이탈리아 전쟁(1991~2)을 일으켜 승리하여 이 지역을 얻은 후 리비아라 개칭하였다.
5) 러시아의 帝國主義
1. 러시아 제국주의의 특색
러시아는 유럽의 자본주의 발달에 따른 帝國主義 성립 관계와는 다른 측면이 있다.
즉, 19세기말까지 여전히 봉건적 농업국가
형태를 탈피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부동항을 획득하려는 남하정책에 기인하였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발칸 지역에 세력을 확장하여 곡물 수출의
안정적 기반확보를 필요로 시작하였고 20세기 초 국내의 급속한 공업화 및 자본의 독점화 강화를 맞아 발칸 지역의 시장 확보가 필요하게
되었다.
2. 汎 슬라브 主義 (Pan Slavism)
발칸지역은 게르만 민족보다는 그리스 정교회를 신봉하는 남 슬라브 계통의 민족이 대부분 거주하여 러시아는 이름하여 汎 슬라브 주의를
표방하며 민족적 사명감을 느끼고 인구면에서도 슬라브족이 압도적이어서 러시아를 ‘큰형의 나라’로 간주하고 있었다.
세르비아
애국주의자들은 당시 오스트리아 지배하에 있던 보스니아, 헤르체코비나를 통합 大 세르비아 건립을 꿈꾸었다. 이는 달리 말하면 오스트리아 제국
붕괴를 의미하기 때문에 汎 슬라브 주의 팽창에 대한 저지는 오스트리아로써는 피할 수 없었으며 이를 지원하는 러시아와는 충돌을 막을 수 없었다.
다행히 당시 러시아의 군사력은 다소 미약하여 제 1차 발칸전쟁(1912)까지는 소강상태를 유지하였다.
6) 美國의 帝國主義
1. 먼로주의
1861~1856년의 남북전쟁 이후 비약적으로 산업자본주의 길을 걸은 미국은 다른 유럽 중심부 나라와는 달리 직접적 영토 합병에는
소극적이었으며, 먼로대통령의 경우 타국의 침략이나 간섭도 반대한다는 입장을 천명하였다. 그러나 미국이 서부 개척을 완료하고 강대국의 지위에
오르자 서반구의 맹주의식이 싹터 19세기 말 국제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되었다.
2. 중남미와 태평양
중남미 지역에서는 19세기 초반에 대부분 독립을 이룬 이 지역 국가들은 경제적 취약과 부패한 정치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이즈음 미국은 직접적 식민지화에 대한 필요성이 부족하여 영토 합병에도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취득한 파나마 운하로 야기된
미서전쟁(1898)의 결과 스페인으로부터 푸에르토리코와 쿠바 지역의 지배권을 획득하였으며 태평양 지역으로는 괌, 필리핀 획득이 있었다. 결국
중남미에서 제국주의 영토분쟁이 심화되지 않는 것은 먼로 선언을 계기로 하여 미국과 유럽 열강들 사이에서 미묘한 세력 균형과 상호이해가 있었기
때문이다.
7) 日本의 帝國主義
1. 중국의 진출
1869년 메이지유신 明治維新으로 근대화를 시작한 일본은 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급속한 산업화를 이루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아시아의 군사대국으로 떠올랐다. 조선의 동학혁명 진압과 관련하여 청일전쟁(1894)의 승리로 요동반도와 대만을 할양받고 국가주의가
고양되어 군가공업, 중공업에 투자를 확대하고 군비를 늘렸다. 러일전쟁(1904)도 승리로 이끌어 여순 대련의 조차권과 장춘여순간의 철도권,
사할린 남부의 할양을 인정받았다.
만주에 진출해있던 일본은 만주사변(1931)을 일으켜 괴뢰정부 만주국을 세우고 간접지배의 길을 텄으며
북경 근교에서 노구교사건(1937)을 야기하여 중국에 전면 침략을 감행 중일전쟁의 불씨를 만들었고 남경 학살에서는 20~30만 명의 무고한
민간을 학살하는 참극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어 태평양 제도와 동남아 진출을 꾀하여 결국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고 독일, 이탈리아와 함께 추축국
일원이 되었다.
2. 한국의 합병
러일전쟁 후 한국에 통감부를 두고 지배권을 행사하던 일본은 한국을 합병 (1910) 조선총독부를 두고 본격적인 식민
지배를 시작하였다.
8) 여타 국가들의 帝國主義
벨기에, 스페인, 포르투갈
벨기에 레오폴드 2세는 아프리카 탐험에 나서는 미국인 스텐리를 후원 그의 의견에 따라 국제
아프리카 협회(1876)를 결성 당초에는 인도주의 목적을 가지고 시작하였다. 그러나 결국 그 단체를 이용 콩고의 땅을 얻었으며 스페인,
포르투갈도 나름대로 아프리카에 진출하여 일정 부분을 할양 식민지 경쟁에 참여하였다.
4. 맺음말
19세기 後半의 帝國主義는 과거 어느 시대의 식민주의 운동보다도 상이한 經濟的, 政治的양상을 띠었다. 마침내 帝國主義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치는 동안 아프리카 분할 및 아시아 침략을 초래하였다. 또한 19세기 帝國主義는 식민지역에 政治, 言語, 文化를 비롯한
다양한 부분에 폭 넓은 여파를 남겼으며 우리나라의 경우 일제 36년 강점기의 영향이 半世紀가 흐른 지금까지도 치유되지 못한 상처로 남아 있다.
즉, 아직도 미해결의 문제로 남은 위안부 문제, 문화재 반환 문제, 재일교포 지위 문제 등에서 보듯이 우리의 현실에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나아가서는 정치적 굴레가 사라진 후에도 자본주의 체제는 多國籍企業과 같이 단지 모습을 달리할 뿐 오히려 ‘國際的 分業’ 이라는 정교한 발전 된 논리가 통용되고 있다. 그 결과 옛 식민지역은 여전히 경제적으로 선진 자본에 예속될 수 밖에 없고 이러한 불균형은 南北問題의 形態로 현 국제정세에서 뛰어 넘어야 할 課題로 남아 있다. 끝.